[소설] 인공태양(23)

by Neutron

김반장의 지시는 구체적이었고 그는 담당자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맡겼다. 직원 모두는 그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경애씨가 법원과 은행 등에 알아본 결과 그 어음의 채권자가 상문건설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금액은 오십억 원이었는데 이상한 건 열흘짜리 어음이라는 사실이다. 상거래 상 일반적인 어음 만기일은 최소 한 달인데, 이렇게 짧은 단기 거래가 있었다는 것은 회사 운영과 상관없는 차입일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돈이 회사 경영에 쓰인 증거를 찾을 수가 없어 심지어 횡령 후 의도적 부도일 가능성도 농후했다.


상문건설은 깡패 정상문의 회사인데 어떻게 우리 회사 사장과 그런 거래를 하게 된 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나는 김반장에게 정상문과의 만남부터 그가 국회의원을 협박하여 리조트 개발권을 가지게 된 경위를 설명해 주었다. 다만 그의 살인 현장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 말을 들은 김반장은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고 리조트 개발 계획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그 자료들을 검토해 보니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공장 자리가 그 리조트 개발 부지에 포함된 것이다. 리조트 개발 부지가 최근에 변경되었는데, 원래는 공장에서 멀리 떨어진 청풍호 인근 산자락이었다가 갑자기 그 개발 범위가 넓어지더니 공장 근처까지 침범한 것이다.


최종 개발 범위는 아직 허가 전이지만 공장만 없어지면 불가능한 계획이 아니다. 원래 공장이 운영되는 땅은 산업집적활성화법에 의하여 유원지 등으로의 개발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공장의 폐업 등 더 이상 산업용지로의 활용도가 존재하지 않을 경우 부지 용도 변경을 신청할 수 있다. 정상문이 이 점을 노리고 일부러 사장과 담함을 했을 거라는 추측이 충분히 가능하다. 분명히 그 과정에서 내게 했던 것처럼 사장의 가족을 인질로 협박했을 가능성도 있다. 돈을 위해서라면 자신과 관계없는 사람들의 생계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그의 무자비함에 다시 한번 치가 떨렸다.


"퍼즐을 맞춰보면, 사장이 공장 문을 닫기 위해 일부러 부도를 낸 것이고, 그 뒤에는 정상문이란 자가 있다."


김반장은 정상문을 직접 만나야겠다며 연락처가 있느냐고 내게 물었다. 그 순간 그가 건네준 명함이 생각났다. 그에게 다시 연락할 거라는 생각을 못하고 방 안에 아무렇게나 던져둔 기억이 난다. 나는 김반장과 함께 집으로 뛰어갔다. 방 문을 열고 둘러보니 방 한 구석에 그의 명함이 보인다. 나는 명함에 적혀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정상문이 내 전화를 기다렸다는 듯 반갑게 받는다.


"우리 능력자 동생! 왜 이제야 전화를 했어?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협조하기로 마음을 바꿨나? 그렇다면 형님이라고 불러줄 수도 있지... 하하하."


직접 만나서 얘기하자고 하니 3일 뒤에 자기 사무실로 방문해 달라고 한다. 요즘 너무 바빠서 몸을 빼기가 힘들단다. 주소를 받고 만날 날짜와 시각을 정한 뒤 전화를 끊었다. 김반장과 나는 그를 만나 무엇을 어떻게 이야기할지 계획을 세우기로 했다.


"그가 마음먹고 공장 문을 닫게 하려 한 거면 우리도 만반의 준비를 하고 만나야 할 거야. 3일 안에 어떻게든 투자처를 찾아내서 그가 발행한 어음을 갚고 법원에 회생 신청을 해야 한다. 그 방법이 공장을 살리는 유일한 길이다. 아니면 정상문에게 사정을 해야 할 텐데... 그는 쉽게 봐주지 않을 거다. 뭔가 큰 대가를 원하겠지."


3일 후 나와 김반장은 약속한 장소에 도착했다. 시내 중심가에 우뚝 서 있는 제법 높은 건물이다. 그 지역에서 거의 유일한 10층이 넘어가는 건물 꼭대기 층에 그의 사무실이 있었다. ‘상문건설’이라고 적힌 명패가 달려있는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널찍한 홀이 나오고, 기다란 탁자를 둘러싼 소파에 예닐곱의 남자들이 앉아있는데, 그중에 누나 식당에서 행패를 부리던 동생들도 끼여있었다. 우리를 발견한 한 명이 ‘회장실’이라고 적힌 문을 열고 들어갔고, 잠시 후 정상문이 환한 얼굴을 하며 나타났다.


“어서 와, 동생. 이 분은 누구신가?”

“우리 공장 일을 책임지시는 김반장님이에요.”


정상문은 김반장을 위아래로 한 번 훑고 나서 우리를 방으로 안내했다. 그의 방 안 물품은 사무용 책상 하나와 의자 하나, 그 앞에 작은 탁자를 둘러싼 소파가 전부였다. 모두 새것들로 누가 봐도 급하게 이사 온 티가 났다. 그러나 그 방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벽에 걸린 커다란 조감도였다. 'A 리조트 개발 계획'이라는 굵은 글씨 아래 여러 채의 건물들이 배치된 그림에는 청풍호를 둘러싼 크고 작은 산들이 수려한 경관을 뽐내고 있었다. 정상문은 마치 자랑이라도 하듯 그 그림을 응시하며 말한다.


"어때? 멋있지 않은가? 동생이 도와준 덕분에 이런 큰 사업을 할 수 있게 됐지. 조금만 더 도와주면 더 큰돈을 만질 수도 있는데... 아쉽지만 거기까지는 욕심을 내지 않겠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욕망으로 뒤덮인 그의 눈은 더 큰 무언가를 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는 자신의 사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업이라는 게 말이야, 공장을 돌려서 물건을 파는 게 다가 아니더라고. 이 세상에는 자기 돈을 주체할 수 없는 인간들이 생각보다 많아. 그들은 우리와는 또 다른 고민을 가지고 있지. 이 많은 돈을 어떻게 굴려야 할까. 어디에 투자를 해야 이익이 극대화될까. 하루 종일 이런 고민에 빠져 산다. 우리가 먹고살 걱정을 하는 만큼의 고통이라고 할 수 있지. 내가 하는 일은 그들의 그런 고민을 해결해 주는 거야. 개발 사업에 투자를 하게 하는 거지. 그럼 그들은 배당 수익만으로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거야. 가진 돈을 잃지 않는 것이 그들 삶의 유일한 목표일 뿐이다. 그 덕분에 판을 깔아주는 나 같은 사람도 먹고살 수 있는 거고."


그때 김반장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들이 벌어들이는 돈이 대부분 어디서 나오는 건지 아는가? 바로 우리 같은 공장 노동자들의 피와 땀이 묻은 월급과 세금이다. 그 돈이 은행을 거쳐 그들에게 흘러들어 간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그들의 배를 불리려고 공장을 없애버린다면 당장은 돈을 벌 수 있어도 결국에는 모든 걸 잃게 된다는 사실을 모르나?"


가을 서리처럼 차가운 지적이었다. 그러나 정상문은 김반장을 잠시 노려보더니 이내 웃으며 말한다.


"김반장님이라고 했나요? 너무 멀리 가신 거 같은데. 난 그 '결국'이라는 미래는 아직 생각을 안 하고 삽니다. 정말 그렇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고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굴리는 게 뭐가 잘못된 거라고... 또, 공장을 없애버린다니, 그건 또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우리 회사가 여기 상문건설에 발행한 50억 어음의 만기일이 딱 열흘이다. 상문건설은 어음을 부도처리해서 공장을 폐쇄시켰고. 상거래 관행 상 찾아볼 수 없는 짧은 기간의 어음이다. 이런 무모한 거래가 일어난 데에는 필시 정상적인 거래가 아닌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게 내 추측이다."

"추측만 가지고 뭘 따지러 온 거네요, 그러니까."


정상문은 한바탕 크게 웃고 나서 정색을 했다.


"박사장이 하도 급하다고 해서 돈을 빌려준 게 전부입니다. 열흘이면 족하다고 해서 10일 만기 어음으로 합의한 거고요. 우리도 자금 사정이 넉넉지 않아 공장이라도 팔아 현금을 조달해야 할 처지라구요."


김반장은 품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내 탁상 위에 놓았다. 은행에서 발행한 '공탁 증명서'였다. 김반장은 회사 부도 직후 투자처를 찾아다녔다. 현금을 보유한 큰 손들을 수소문 하여 차례로 방문하였으나 대부분 거절당하고 돌아오기 일쑤였다. 다행히 그중에 국내 제조업을 중히 여기는 자산가를 만나게 되어 투자를 얻어낼 수 있었다. 그가 누구이고 어디 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김반장은 그냥 고마운 분이라고만 말해주었다. 김반장은 그 돈을 은행에 갚고 채무이행에 따른 공탁 증명서를 받아낸 것이다. 이 공탁 증명서가 있으면 채권자는 이유 없이 우리 공장의 정상화를 방해할 수 없다.


그 종이를 뚫어지게 들여다보던 정상문은 표정이 잠깐 일그러지더니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


"다행히 돈을 마련했군요. 그렇게 큰돈을 어디서 구하셨을까?"

"그건 자네가 알 바 아니고, 이제 더 이상 공장 가동을 막을 수는 없네."


김반장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나가려고 하자 정상문이 음산하게 소리쳤다.


"잠깐! 내 일을 방해하는 자는 그 누구도 곱게 놔두지는 않을 거다."


정상문이 눈짓을 하자 옆에 서 있던 남자가 휴대폰을 들고 다가왔다. 정상문은 그 휴대폰을 받아 들고 내게 화면을 보여주었다. 화면을 들여다보니 어딘지 모를 캄캄한 방에 엄마가 의자에 묶인 채 앉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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