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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키운다는 것

믿어주는 일

by Neutron

아들놈은 어려서부터 생각이 독특했다. 그 녀석의 말을 가만히 들어보면 염세주의자가 떠올랐다. 이 세상에 흥미가 없는 듯한, 살아가는 것이 의미가 없는 듯한 말을 여러 번 했다. 가끔 죽고 싶다고도 했다. 초등학교 5학년때 소설을 하나 썼다. 초등학생이 썼다고는 믿기지 않는 아주 무거운 글이었다. 플롯과 문장은 어른이 보기에도 좋았다. 그러나 그 소설의 주인공은 어린 나이에 죽는다. 아이가 이런 어두운 생각에 갇혀 산다는 것을 알았을 때 부모로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나는 이 아이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즐거움을 알려줘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려야 했다.


이 녀석의 또 다른 문제는 자존감의 결여였다. 자기는 못난 놈이라고 말하곤 했다. 공부도 싫어하고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어서 자기는 이 세상에서 별 쓸모없는 존재 같다고 말하곤 했다. 학교에서 내 준 숙제도 잘 해가는 편이 아니었다. 숙제를 내팽개치고 컴퓨터 게임에만 빠져있었다. 같은 또래들이 잘 따라가는 데 비해 우리 아이만 너무 뒤처지는 것 같았다. 윽박을 지르면 그 순간은 말을 잘 듣는 것 같았으나 얼마 가지 않아 자유로운 영혼으로 되돌아갔다. 부모가 처음이라 아이 교육을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아이의 영혼에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올바른 길로 안내하는 것이 매우 힘들었다.


무언가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나와 아이는 두바이로 떠났다. 주재원으로 발령이 났다. 아이 엄마는 한국에서 직장에 다녀야 해서 두바이에는 아이와 나 둘이 있었다. 그곳에서의 생활도 아이에게는 부담이었다. 낯선 환경, 낯선 사람들, 낯선 언어, 이 모두가 아이에게는 스트레스였다. 선생님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해 숙제를 못해갔고 방과 후에 학교에 남아있는 벌을 받곤 했다. 해외 생활이 한 달도 안 되어 그 녀석은 엉엉 울면서 한국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몇 달만 더 버텨보고 정 안되면 돌아가자고 한참 동안을 달랬다.


그 후로 여섯 달 정도 지나자 집에 친구들을 데려왔다. 살만이라는 친구는 두바이 은행장의 둘째 아들이었다. 두바이 귀족이고 부자였다. 또 다른 친구는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태리 국적이었고 사업하는 아버지를 따라 두바이에 왔다. 그 아이들은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며 아주 재미있게 놀았다. 물론 영어를 썼다. 나는 그 고마운 친구들을 위해 기꺼이 피자를 시켜주었다. 그리고 친구들이 돌아간 후에 특히 살만과 친하게 지내라고 말했던 것 같다.


주재원 생활은 힘들었다. 법인과 본사의 관심을 한 몸에 받기 때문이다. 지친 몸을 이끌고 저녁에 집에 오면 아들놈은 어김없이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 대해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아이 공부에 신경 쓸 정신적 여력이 없었고 스스로 공부의 필요성을 느낄 때까지 기다려 주고 싶었다. 주말에는 밤을 새우고 게임을 하는 것 같았다. 그쯤 되면 게임 중독이라고 할 만했다. 그러나 나는 아이의 건강을 염려하는 말만 가끔 하였고 공부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게임에만 몰두하던 아이가 어느 날부터 책을 펼쳐 들기 시작했다. 왜 게임을 안 하느냐 물었더니 싫증이 났다고 했다. 그렇게 책상 앞에 앉아있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더니 교과 과정을 제법 잘 따라가는 것 같았다. 영어도 많이 익숙해져서 수업 이해도가 향상된 것 같았다. 혼자 게임만 하던 아이가 갑자기 교내 뮤지컬 동아리에 가입했다고 했다. 숙제도 안 해서 선생님에게 자주 혼나던 아이가 이달의 학생에 선정되었다. 학교 대표로 수학 경시대회에도 나갔다. 물론 한국 중학교 수준의 수학 레벨을 상상하면 안 된다. 그래도 너무 대견하여 폭풍 칭찬을 해 주었다.


아이의 방학을 이용하여 한국에서 휴가를 보낸 적이 있다. 아들놈은 초등학교 때 친하게 지내던 동창들을 만났다. 아이의 친구들은 학원에 다니느라 휴일에도 시간을 내기 어려웠다고 했다. 다시 두바이로 돌아왔고 아들놈은 공부에 연극 연습에 바쁘게 학교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어느덧 4년이 지나 귀임할 때가 되었다. 초등학교 동창들과 그동안 연락을 지속하고 있던 아이의 입에서 한국에 돌아가기 싫다는 말이 나왔다. 학원을 전전하며 고생하는 친구들을 보니 자기는 그렇게 힘들게 공부할 자신이 없다고 했다.


할 수 없이 아이를 혼자 싱가포르에 보냈다. 거기서 고등학교 3년을 혼자서 잘 버텼다. 그리고 좋은 점수를 받아 그럭저럭 괜찮은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경제학을 선택했는데 이는 신의 한 수였다. 인생에 있어서 최고로 잘한 뽑기였다. 아들놈은 경제학의 매력에 푹 빠졌고 부전공으로 수학을 선택했다. 졸업 후 취업에 유리한가 불리한가는 걱정하지 않았다. 나는 단지 아들놈이 성취의 경험을 많이 하고 세상이 살아갈 만한 곳이라는 믿음만 가지기를 바랐다.


아들놈은 이제 죽고 싶네, 나는 못난 놈이네 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가 좀 똑똑한 학생이고 운이 매우 좋은 사람 같다고 한다. 유명 대학에 입학하여 처음에는 잘할 수 있을까 두려웠는데 동기들과 경쟁해 보니 할 만하다고 하였다. 아들놈은 3년 만에 졸업하였고 현재 대학원에 합격을 해 놓은 상태다. 비싼 학비가 걱정이 되기는 하지만 교수가 되고 싶다는 아이의 꿈을 적극 지원해 주기로 하였다. 주변에서 아이를 잘 키웠다고 부러워한다. 비결이 뭐냐고 물어본다. 그래서 아이가 어렸을 적 이야기를 해 주면 다들 깜짝 놀란다.


우리 부부는 결혼 당시 가난했고 맞벌이를 해야만 했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에도 아이 엄마는 직장을 그만둘 수 없었다. 그때만 해도 육아휴직은 꿈도 못 꿀 시절이었다. 아이의 육아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몫이었다. 할아버지는 암투병 중이었다. 병이 악화될 때마다 할아버지는 병원에 입원해야 했고 아이는 경남 진주 외할머니 댁으로 보내져야 했다. 일 년에 몇 번씩은 벌어지는 일이었다. 아이가 일곱 살이 되던 해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그 후로도 할머니의 돌봄으로 자랐다. 친할머니와 외할머니는 사랑으로 아이를 돌보았지만 어려서부터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변하는 생활환경이 아이를 불안하게 만들었을 수 있었다.


아이는 심리 상담을 받을 정도로 이상한 증세를 보였다. 죽음에 대해 자주 말하고 살아가는 재미가 없다고 이야기하곤 했다. 그것이 어릴 적 자주 변했던 환경 탓인지, 한국 교육 시스템에 적응을 못해서인지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아이에게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은 믿어주는 것 말고는 없었다. 게임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할 때에도 나무라지 않았다. 그 대신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고 여러 경험을 하게 해 주었다. 역사 전시회나 뮤지컬 공연 등에 데리고 다니며 최대한 많은 것을 보여주려고 하였다. 아이를 교육하는 방법은 몰랐다. 하지만 일관되게 해온 한 가지는 아이를 믿어주는 것이었다.


지금에 와서 깨달은 바가 있다. 아이가 부모의 뜻대로 가지 않는다고 억지로 그 방향을 틀면 안 된다. 아이는 존재만으로도 부모에게 행복이다. 사는 게 재미없다거나 죽고 싶다거나 하지 않는 게 어디인가. 그 대신 혼자 스스로의 힘으로 올바른 방향을 설정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다양한 정보와 경험을 주고 그중에서 취사선택하게 해야 한다. 학교 성적이 나쁘다고 해서, 학원에 안 가겠다고 떼를 쓴다고 해서 공부를 억지로 강요하면 안 된다. 인생은 길고, 스스로 강해지는 시기는 사람마다 다르다. 그 시기가 올 때까지 부모는 아이를 믿어주면 된다. 믿음과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자란 아이는 절대로 엇나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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