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비게이션
어디까지 가세요?
친절한 그녀, 미스 킴
천천히, 조심조심 잔소리 지긋지긋해도
자고로
여자 말 들어 손해 볼일 없다잖아요
어쩌다 한 눈 팔아
슬쩍 외도할라치면
핑그르, 눈물 돌아 동동 발 구르다가도
이내 곧
300미터 앞 유턴하라 일러주죠
그땐 미처 몰랐죠
사막 낙타처럼 길들여질 줄
주인아씨께 절절매는 머슴 꼴이라니요
어쩌죠?
그녀 없이는 오도 가도 못하니….
내가 길을 가는 걸까, 그녀가 날 이끄는 걸까?
처음엔 단순한 길 안내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친절했고, 한 치의 오차도 없다. 때로는 잔소리 같았지만, 이상하게도 믿음이 갔다. 한눈팔면 울먹였고, 엇나가면 동동 발 구르며 다시 길을 알려주는 그녀. 꼭 '오래된 연인'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내 의견 따위 묻지 않는다. 그녀의 말투엔 언제나 묘한 권위가 있다. “~하세요.” 권유도, 청유도 아닌 단정한 명령. 그 한마디에 나는 핸들을 돌리고, 속도를 줄이고, 그녀의 침묵 한순간에 길을 잃는다. 처음엔 그저 ‘편리한 장치’였을 뿐인데, 이제는 그녀 없이는 오도 가도 못 하는 신세가 되었다.
‘친절한 그녀’는 내비게이션에만 있는 게 아니다. 우리가 길들여져 있는 관계, 습관, 일상, 편리함 속에도 그녀는 늘 다정한 얼굴로 자리차지다. 그 속에서 우리는 점점 더 온순해지고, 더 의존적으로 변해간다. 그러면서도 그 익숙함이 주는 안도감이라니….
운전을 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대체, 내가 혼자 할 수 있는 것은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