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봐도 한눈에 끌릴 만큼 깔끔한 헤어스타일, 훤칠한 키에 슈트가 잘 어울리는 다부진 어깨? 아니다. 전혀 아니었다. 청바지 차림에 민소매 흰 면티, 슬리퍼 찍-찍- 끌며 건들건들 걸어오는….한마디로 양아치 폼이다. 횡단보도 중간 지점 비켜 지나는 순간 그 남자 어깨에 문신을 봤다. 그것도 푸르스름한 색깔을 띤 나비 문신이다.횡단보도 다 건너기 전 뒤돌아보며 "어? 문신이네." 중얼거리며한번 더 쳐다본다.
요즘 세상이야 타투나 문신을 개성의 표현으로 봐줄 수 있다. 하지만 1982년도에 보란 듯 문신을 드러내고 다니는 것은 흔치 않은 광경이었다. 보통은 조폭에 연루되어 있던지, 과거에 그쪽 세계에 발을 들여놨었던지로 해석되기 쉽다. 문신 하나로 그 남자의 품행을 지레 짐작한다. 한 마디로 저렇게 막되어 먹을 수 있을까? 그런데 순간 부러웠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잖아. 자유로운 영혼이네.
참, 좋겠다.
당시 집에서 대학교까지 시외버스로 통학하고 있었다. 그런 중 버스터미널에서 그 남자애를 두 번째 마주쳤다. '나비를 또 보네.' 처음에는 우연인가 했는데 걷다 보니같은 방향이다. 나중 알고 보니 같은 지역에 살며 같은 학번에, 같은 대학교를 다니고 있던 거였다. 그 이후 버스에서 종종 보게 되었고 나란히 앉을 기회가 있어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그 아이는 대만 국적의 화교였다. 한국에서 태어나 줄곧 우리나라에서 살았다고 한다.집안이 넉넉한 편이라 돈 쓰는데 구애받지 않았고, 처음 본 이미지 그대로 자유분방했다. 사범대학 우리 과(科) 수더분한 남학생들과 비교한다면 '제 멋대로'인 게 분명하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주변 눈치를 살피고 조신하게 행동하는 나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오히려 그런 나를 보고 "왜 그래야 해?" 이해할 수 없다는 투다.
처음에는 '제멋대로'인 것을 부러워하고 동경했지만 차츰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그 애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옆에 같이 있는 것이 창피해서 숨고 싶을 때도 있다.“남들이 너를 어떻게 보겠니?” 자꾸만 내 식으로, 내 기준을 들이대니 사사건건 갈등이 생긴다. 보기와는 달리 심성은 착한 편이라 나름 애쓰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러나 '나, 삐뚤어질테야'가 몸에 밴 습성 탓인지 오래가지 못하고 늘 싸움이 된다. "너는 우리나라 사람들 정서에 참, 안 맞아." 쏘아붙이곤 한다.결국 그 아이는 대학교도 중도 포기하고 자기 나라로 날아갔다.
훨훨~ 나비처럼
우리 집은 노력한 만큼만 얻는 정직한(?) 형편이다.
'도와달라' 누구에게 손 벌리거나 어디 비빌 언덕이라고는 없다. 거기다가 가장 노릇을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내가 고등학교 때 아버지마저세상을 떠나셨다. 어린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집에서 독립하고, 부모를 떠나고, 내가 태어난 지역을 벗어나는 그날까지…. 어른들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서 눈치를 살피며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엄마 혼자 삼 남매를 키워야 했고, 우리가 기댈 데는 엄마뿐이다. 엄마도 혼자 해내기 버거웠던지"난, 너희들만 보고 산다." 혼잣말을 되뇌곤 했는데주문이라도 걸듯 우린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아비 없는 '후레자식’이라고 흉 잡힐라 말대꾸하지 않고, 앞에 나서 설치지 않고늘 조신하게 굴어야 했다.
너, 원래 그런 얘 아니잖아.
학교에서도 공부 잘하고, 선생님 말씀 잘 듣는 착한 아이로 성장하였다. 소읍 작은 학교라 특출 난 학생도 별반 없는 터이지만 “역시, 너밖에 없다니까.” 선생님들 칭찬이 점점 더 나를 학습시켰다. 뭔가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면 “네가 그럴 줄 몰랐어. 너, 그런 얘 아니잖아~.” 말씀하신다.
지금 생각해 볼 때 좋게 말하면 무한 신뢰와 기대라지만 일종의 '가스라이팅' 아니었나?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들기도 한다. 나는 그렇게 '착한 아이'로 길들여져 성장했고, 결국엔 약도 없는 '모범생 콤플랙스 증후군'이라는 고질병을 달고 살게 되었다. 그 이후 어른이 되어서는 학생들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고, 거기다 교장이 되어 '자리의 품위'까지 지켜야 하니 무던히 애쓸 수밖에 없었다.
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널 위해서….
교사로 발령 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참교육’을 실천하겠다는 교사 단체가 생겼다. 그 단체 취지에 공감하여 매월 회비를 냈다. 지금은 합법화되었지만 당시에는 학생들을 나쁘게 물들이는 단체처럼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특히 교감, 교장선생님께 수시로 불려 갔다. “노선생이 어려서 뭘 모르는데 탈퇴하는 게 좋겠어.” 교감선생님이 한 마디 한다. “딸 같아서 하는 말인데 내 말 무슨 뜻인 줄 알지?” 교장선생님이 달래듯 말한다. 그래도 ‘내가 뭘 잘못한다는 거지?’ 납득이 안되었다. “어른이 이렇게까지 사정하는데 말이야. 고집불통이군” 야단을 맞는다. 나중에는 버르장머리 없다는 소리까지 듣게 되었다.
편들어 줄 것 같은 동료교사도 “왜 그리 힘들게 살아?” 한 마디 한다. 연륜이 쌓였다는 선배 부장교사도 “그냥, 남들처럼 대충 둘러치면 될 것을… 쯧쯧.” 안타까운 듯 혀를 찬다. '널 위하여….' 인심 쓰듯 하는 말들이 왜 그리 아니꼽던지.
네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뭐야?
검은색 큼지막한 뿔테 안경에 어깨까지 파마머리로 한껏 띄운 헤어 스타일, 눈썹 선에 맞춘 앞머리까지…. 대학교 시절, 사진 속 내 모습이다. 지금 그 사진을 보면 촌스러움의 극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하루는 단짝처럼 붙어 다니는 친구에게 “내 머리 어때? 자를까? 말까?” 물었다.
“네 머리도 마음대로도 못 하면, 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뭔데?” 별 시답지 않은 질문에 대꾸하듯 한 마디 툭, 던진다.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했다. “그렇지. 이건 내 머리지." 설령 맘에 안 들면 자랄 때까지 기다리면 될 것이다. 드디어 용기를 내미장원 가서 귀가 보일 정도로 숏커트로 잘라버렸다. 후련했다. 그때 그 친구의 말 한마디가 지금까지 내가 살아오는데중요한 기준이 되어준다. 나름 '질러버리는 용기'를 얻은 것이다.
나이 드니 사람도 달라진다.
집에서는 며느리에서 시어머니가 되어있고, 학교에서는 교사에서 교감이 되고 교장으로 자리가 달라졌다.역할과 입장이 바뀌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공격수에서 수비수 자세를 취하고 있다. 돈키호테처럼 창하나 들고 겁 없이 덤빌 때와는 달리 갑옷을 갖춰 입고 경계태세다.
그렇다고 눈치를 안 보고 사는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 성장기 때와는 또 다른 '눈치'보기다. 어렸을 때는 '착한 아이'가 통했지만'착한 어른'이라고 좋은 소리 듣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숙맥이 되거나 뭘 모르는'어리버리'라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말 한마디하고도 '내가 잘한 건가?'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일까?'점검해야 한다. 그러니 다른 사람 평가에, 남들 시선에 자유로울 수 없다.
퇴직을 앞두고 있는 지금, 첫 번째 화두가 '눈치'다.'눈치 안 보고 살기'다.
나비문신에 열광하던 20대는 아니지만 남들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에 대한 부러움은 여전하다.제 멋대로 살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눈치 보지 않고 적어도 '싫으면 싫다'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정채봉 작가의 <초승달과 밤배>라는 소설이 떠오른다. 주인공 소년의 이름이 '난나'다. 본래 이름이야있겠지만 누군가 물어보면 자신을 '난나'라고 한다. 난나?'나는 나'라는 의미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