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오스크 #컴퓨터 #AI시대 #신문물
가게문 열고 들어서자 상냥한 목소리로 반긴다. 인사말 어미 살짝 치켜올린 ~요! 소리가 칙- 미스트 뿌린 듯 으흠~, 기분 좋다.
자리에 앉으면 종업원이 물컵 내려놓으며 "뭐, 드릴까요?" 묻는다. 벽에 붙은 차림표를 쭈욱~ 흩어보며 "떡볶이가 너무 맵지는 않나요?", "이 식당은 뭐가 맛있어요?", "아이가 싫어하니 김밥에 오이는 빼주세요." 입맛에 맞게 소소한 부탁도 해가며 메뉴를 주문했다.
젊은이들은 이런 이야기하는 나를 "요즘 세상에?" 어이없어할 거다. 아니면 "여봐라! 게 누구 없느냐?" 외치는 얼치기 양반쯤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요즘엔 김밥 한 줄 사 먹자고 분식점 들어서도 키오스크를 통과해야 한다. 무슨 메뉴가 있나? 뭘 먹을까? 키오스크 <시작> 버튼을 누르는 것부터 시작이다. 무식하면 손발이 고생한다고 했는데 이제 돈이 있어도 쫄쫄 굶을 수밖에.
커피 한잔 마셔볼까?
주문하려고 하자 종업원이 '뭐지?'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며 키오스크를 가리킨다. "아? 네~" 키오스크가 있다는 걸 미처 몰랐던 거다. 여기서부터 살짝 주눅 든다.
키오스크 앞에 서서 심호흡한다. 일단 내 뒤에 기다리는 사람이 없어 다행이다. 나는 묵직한 바디감보다는 산미가 느껴지는 커피맛을 좋아한다. 그런데 상대해 주는 직원이 없으니 물어볼 수가 있나? 할 수 없지. 우리나라 사람들이 선호한다는 케냐 A / 예가체프 중에서 살짝 고민하다가 케냐 A로 한다. 그다음 핫 / 아이스를 선택할 때부터 슬슬 뒤퉁수가 따갑다. 젊은 애들은 얼어 죽어도 아이스커피라고 '얼죽아'를 찾지만 나는 핫!이다.(내 뒤에 3명이 서있다) 스몰 / 라지 컵 사이즈 중에서 스몰을 선택한다.(7명으로 늘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마시고 갈 거냐, 가지고 갈 거냐, 매장 / 포장 중에서 매장을 누른다.(10명이 넘는 듯하다) 이제 결재방식만이 남았다. 현금 / 카드 / 00 페이 중에서 뭐로 하지?(에휴~, 한심하다는 듯 뒤에서 누군가 한숨 내쉰다) 아차, 포인트 적립을 안 눌렀네.(아직 먼 거야? 그러니까ㅠㅠ) 에이, 그까짓 몇 푼 아끼자고…. 관두자. 관둬!
나이 먹어서 버벅댄다고 할까 봐 연신 다음, 다음을 눌렀더니 뭘, 어떻게 시켰는지도 모르겠다. 할인 혜택, 프로모션 같은 것을 챙길 엄두는 아예 내지도 않는다. 한참만에 음료가 나왔으니 가져가라고 진동벨이 울린다. 커피 한잔 마시기가 이리 어려워서야.
커피 맛 한번 오지게 쓰네.
여기도 언제 바뀌었지?
오랜만에 영화관을 찾았더니 키오스크가 문지기처럼 떡하니 버티고 섰다.
자, 해볼까? 영화 제목, 상영 시간, 좌석, 티켓 매수 체크까지 수월하게 잘 넘어간다. 그런데 결제 단계에서 다음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힘껏 눌러도 보고, 살짝 터치해 보기도 하고, 손가락에 호오~ 입김 불어 도장 찍듯 눌러봐도 먹히지 않는다.
"얘가 왜 이래? 미치겠네." 진땀 뺀다. 할 수 없이 팝콘 매점 아르바이트 직원 도움으로 티켓을 출력할 수 있었다. 그제야 안 되었던 이유를 알았다. 신용카드를 넣지 않았으니 당연히 결제진행이 안 될 수밖에. 아~ 두頭야!
이미 영화가 시작된 다음이라 어두운 영화관을 더듬거리며 겨우 자리를 찾았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영화가 끝나고 주차정산 바코드 읽히는데 또 힘을 뺀다. 이렇게 어려워서야 영화 한 편 마음 편하게 보러 나올 수 있을까.
누구, 사람 없어요!
누구지? 모르는 핸드폰 번호다. 전화를 받자 대뜸 "××아파트 105동 000호 맞죠?" 묻는다. 그렇다고 하자 신용카드가 발급되어 배송하려고 한단다. 우선 본인 여부를 확인하겠다며 내 이름은 물론 주민등록번호 앞자리를 줄줄이 말한다. 무슨 소리지? 나는 카드를 신청한 적이 없는데 말이다.
보이스피싱 아냐? 덜컥 겁이 났다. 일단 끓고 카드사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연결된 듯하여 "여보세요! 여보세요!" 외쳤더니 '보이는 ARS' 화면이 뜬다. 취소를 누르니 이번엔 '들리는 ARS'로 "개인회원은 1번, 사업자는 2번을 누르란다. 1번을 누르자 다음으로 카드분실은 1번, 카드 신청은 2번…. 다시 들으시려면 #자를 눌러주세요."
아, 미치겠다. 그 사이 어떤 놈이 쫙쫙- 내 카드를 긁어 통장에 돈을 다 빼가면 어쩌나? 바짝바짝 피가 마르는 듯하다. 하지만 전화기 너머 여자는 급할 거 하나 없다는 듯 음색 하나 바뀌지 않고 똑같은 톤으로 무한 반복이다.
몇 차례 시도한 끝에 상담원과 연결되었다. 결론은 카드사에서 카드를 배송한 적이 없단다. 아차, 했으면 보이스피싱에 당할 뻔했던 것이다. 무사히 넘긴 것은 천만다행이지만 30분 넘게 ARS와 실랑이한 것을 생각하면 어처구니가 없다.
전화를 끊고 "휴우~" 한숨 내쉬며 나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왔다.
제기랄~
단순무식한 것이 오히려 좋았다.
지지직~, 텔레비전 화면이 흔들리거나 라디오에 잡음이 심하면 툭! 친다. 그러면 뒤퉁수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말짱해진다. 탈탈탈! 탈곡기 소리 내며 가다 서다 하는 낡은 선풍기가 주로 매를 번다. 뿐인가, 복사기나 파쇄기가 먹통이 되면 발로 몇 번 툭툭! 걷어차면 "윙~" 하고 돌아간다. 가전제품 작동이 안 될 때 해결책은 지극히 간단하다. "껐다 켜!"
이제 다 옛말이다.
컴퓨터로 뭘 하려고 해도 상단 메뉴바 열고 그중 하나를 누르면 하위메뉴가 나온다. 그중 또 하나를 눌러 활성화시키고, 그리고 또, 또, 또….
한 단계만 놓쳐도 진행이 안 된다. 융통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 가끔은 분명히 하라는 대로 몇 번씩 반복해도 안 될 때가 있다. 혼자 끙끙대다가 누군가에게 도와달라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한다. 기껏 물어보면 뭐 대단한 것도 아니라는 듯 툭! 키보드 버튼 하나 누르면 끝이다. 나도 똑같이 했는데 왜 내가 할 때는 안되느냐 말이다. "이것들도 나를 무시한다니까."
세상은 자꾸만 진화한다.
정년까지 버틸 것 같던 친구가 명예퇴직을 하겠단다. 그 이유가 상업계고등학교 선생인 자신보다 학생들이 더 앞서간다는 것이다. 거기다 눈만 뜨면 가르쳐야 할 항목이나 내용이 업그레이드되니 허덕허덕 쫓아가기 바쁘단다. 학생보다 교사인 자신이 부진아 같은 지체현상으로 자존심이 상한단다. 100% 이해가 된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은 어느 고리짝 시대 이야기인가. 자고 나서 눈만 뜨면 세상 바뀌는 것을 무슨 수로 따라가느냐 말이다.
안 하는 건가? 못 하는 건가?
브런치 스토리에 새로운 구독자 알림이 떴다.
그런데 이름이 낯설지 않다. '○지?' 우리 학교 특수반 학생 이름인데 설마? 다음 날 복도에서 '○지'를 만났다. 늘 웃는 얼굴로 우리 학교에서 가장 행복한 아이다. 혹시나 싶어 "○지야. 혹시 브런치스토리 알아?" 묻자 고개 끄덕이며 교장선생님 브런치스토리를 봤다고 신나서 말한다. 솔직히 정확하지 않은 발음을 잘 알아듣지 못해서 이해하는데 한참 걸렸다.
바로 그거다. 더하기, 빼기도 힘들어하는 특수반 아이가 브런치스토리를 안다. 뿐인가 앱을 깔고, 구독까지 누른
다. 그런데 내 주변 선생님들은 브런치스토리가 뭔지 모른단다. 핸드폰에 앱 까는 걸 몰라서 "에라, 안 읽고 말지." 한다.
냅둬유~ 그렇게 살게.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것이 쏟아져 나오는 세상이다. 편리해서 좋기는 하지만 신문물 쏟아지는 게 반갑지만은 않다. 무지함, 무식함, 나이 먹음을 조롱당하는 것 같아 영 불편하다.
그러나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는 걸 어쩌나. 밥도 먹어야 하고, 커피도 마셔야 하고, 영화도 봐야 한다. 어디 이뿐일까. 버스표나 항공권은 물론이고 자주 찾는 마트도 손하나 까딱 안 하고 바코드 찍어라, 카드 넣어라, 주차정산하라. 말로만 고객님이지 요것 해라, 조것 해라. 기계가 사람을 부려먹는 세상이다.
어쩔 수 없지. 못해도 해봐야지. 못 한다고 안 해 버릇하면 나 스스로 문명이 멈춘 시간에 갇혀버리는 것을.
나이 들어 가장 자존심 상하는 것이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자연인을 선언하고 산속으로 들어갈 수도 없고. 할 수 없지. 아쉬운 사람이 쫓아갈 수밖에. 시대를 따라갈 수밖에.
쫄지 말고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