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날, 카카오톡 채팅방에 수십 통의 메시지가 날아온다. 열어보면 메시지 절반 이상이 같은 내용이다. '꽃길만 걸으세요~'새로운 출발을 시작할 때 주고받는 인사로 이만한 게 없다. ‘꽃길만 걷는다.’ 참 아름다운 덕담이다.
그런데말이야. '꽃길은 누가 만들어 주는 걸까?' 뜬금없는 의문이 생긴다. 내가 애써 심고 가꾼 꽃길을 밟고 가라는 건가? 그럼 제 인생을 망치라는 거잖아. 아니면, 김소월 시 ‘진달래꽃’처럼 즈려밟고 가라고 아름 따다 꽃길을 만들어주겠다는 거야? 그렇다면 땡큐지. 그것도 아니라면 다른 사람이 피땀 흘려 가꾼 꽃길을 꾹! 꾹! 밟고 가라는 건가? "그건 도둑놈 심보 아녀?" 슬쩍 빈정 상한다. '꽃길만 걸으세요.' 가만 들여다보면잔인한 덕담아닌가. 아니, 덕담이 아니라 악담이잖아.악담.
그리고 지금까지는 자갈밭길만 걸었다는 건가?
신혼여행으로 2박 3일 지리산 종주 어때?
의미 있는 결혼식을 하자. 향교 앞마당에서 연지곤지 찍고, 족두리 쓰고 전통혼례를 올렸다. 신랑 학교 아이들, 우리 반 아이들까지 떼로 몰려와 그야말로 잔치 한마당이다. 당사자인 우리는 빨리 끝나지는 않고 넋이 나갈 정도였다. 이럴 때는 치고 빠지는 게 상책이다 싶어 국수 한 그릇도 제대로 못 먹고 탈출하듯 빠져나왔다.
대신에 얻은 교훈은 '결혼은 두 번 할 것은 아니다.', '의미? 그 딴 것 좋아하지 말자.' 그래도'의미 있게'를좋아한 덕분에 충주시장님에게 증정품 이불까지 받았지만 말이다. 카페 화장실에 가서 가면처럼 쓰고 있던 화장을 지웠다. 그리고 머리장식으로 꽂은 실핀을 이 잡듯 한 움큼은 뽑아냈을 것이다.
자, 이제 시작이다. 배낭 둘러멘 채 작전 수행하듯 기차역으로 향했다. 누가 우리를 한두 시간 전에 결혼식 올린 신랑, 신부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다음은 '의미 있는 신혼여행' 2박 3일 지리산 종주다.
밤새 기차를 달려 다음날 새벽 구례역에 도착했다.
그제야 국밥으로 든든하게 빈 속 채우고 노고단으로 행한다. 4월 중순인데도 산기슭엔 겨우내 내린 눈이 듬성듬성 남아 있다. 하루종일 걸어 연화산장을 지나고 해질 무렵에야 겨우 벽소령 대피소에 도착했다. 4월이라지만 밤공기는 한겨울이나 다름없이 맵짜다. 달달달~ 이가 부딪히는 추위 속에서 3분 즉석 카레로 빈 속을 채우고 커피믹스 마실 때 올려다본 벽소령 달빛이라니….
캬!감탄사가 저로 나온다. 깊고 깊은 첩첩산중이지만 플래시 불빛 없이도 온통 천지가 환하다. 저 달에는 분명 계수나무가 있을 거야. 쿵더쿵! 옥토끼가 방아를 찧고…. 동화 속 이야기가 아니다. 실제 보이는 듯하다.
이게 신혼여행이라구?
지리산 대피소는 TV에서 보던 군대 내부반을 떠올리게 한다. 통로를 기준으로 남·여가 나뉘어 잠을 자야 한다. 남편은 통로 저쪽, 나는 이쪽. 하룻밤 대여비 1,000원짜리 담요 한 장을 깔고 덮고 누웠다. 하루종일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강행군하듯 걸었지만 쉽게 잠이 오지 않는다.
"자요?" 신랑을 불러 본다. 맞은편에서 “아니….” 답이 온다. 뒤척거리다 또다시 불러 본다. "자요?", “아니….” 그렇게 옆 사람 잠 깰라 속삭이듯 몇 번 더 불러보다가 잠이 들었나 보다. 그렇게 신혼 첫날밤은 기차에서 둘째, 셋째 날 밤은 지리산 대피소에서 보냈다.
지리산 종주라니, 미친 짓이다.
산을 타 본 경험도 별로 없는 우리다. 나뭇가지 매달린 리본만 보고 따라 걸었다. 헉헉거리며 죽을힘 다해 올라가면 슬며시 내리막길이다. 저 산, 저 산만 넘으면…. 한 굽이돌아 이제 다 넘었나 싶으면 어디 숨었다가 짠! 하고 나타나듯 더 큰 산 하나가 떡하니 버텨 선다. “미쳤지, 미쳤어. 이게 무슨 신혼여행이람.” 욕 나올 지경이다.
마침내 지리산 정상 천왕봉에 다다랐다.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 나폴레옹의 이런 허세도 부려보지 못했다. 해 떨어지기 전에 하산해야 한단다. 중간이 없다. 아쉬움은 많았지만 '왔노라, 갔노라' 인증 샷! 한 방으로 끝냈다. 그리고 가장 짧은 코스인 백무동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반은 뛰다시피, 반은 구르다시피 하며 내려갔다. 내리막길인 계곡 따라 수많은 돌멩이를 딛고 걷느라 등산화가 연신 앞으로 쏠린다. 결국엔 발톱 3개가 까맣게 죽는 것으로 '신혼여행의 화려한 막'을 내렸다.
지리산 종주길은 예고편일 뿐
그땐 미처 몰랐다. 결혼하고 살면서 앞으로 어떤 고생을 맛보게 될지. 죽고 못 산다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살아가는 데도 지리산 종주길보다 몇 배, 몇십 배 더 힘들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지리산 종주길은 내 인생길을 파노라마처럼 쫘악~, 펼쳐 보여주는 그저 예고편에 불과하다는 것을….
"살아봐. 그까짓 것은 일도 아녀." 어른들 말씀처럼 단지 맛보기일 뿐이다.
지금 난 인생 몇 부 능선을 넘는 걸까?
지리산 종주길. 2박 3일 동안 집채만 한 배낭을 메고 어떤 때는 네 발로 기다시피 오르락내리락하며 “이건 미친 짓이다." 종주먹질 해댔었다. 하지만 지긋지긋한 기억만 있었을까?
목 타는 갈증을 느낄 때 쫄쫄~ 흐르는 샘물도 만났지. 돌부리 걸려 넘어질라 산길만 보며 걷다가 휴~, 고개 들었을 때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이 그렇게 반가울 줄이야. 비 오듯 땀범벅일 때 사르락, 사르락, 바람이 말 걸어주었지. 그땐 나도 모르게 가만 눈 감을 수밖에. 나뭇가지 틈새로 들이치는 햇살은 하~, 눈 부셔. "그래 이 맛이야. 이 맛" 콩꼬투리 터지듯 감탄사가 절로 터졌지.
무엇보다 세석평전 지나며 뒤돌아볼 때 쫘악~, 펼쳐진 야생화 너른 꽃밭을 걷는 기쁨이란. "내가 꽃길을 걸어온 거네."밀레 그림 <만종>처럼 두 손 모아 산의 모든 정령들에게 기도하고 싶은 감동에 가슴 먹먹했었지.
지금 나는 인생 몇 부 능선을 넘고 있는 걸까?다리 쉼 하느라 잠깐 멈춰 뒤돌아보니 어쩜,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이 꽃길이었거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