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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독준 Nov 24. 2020

늘 자책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응원과 격려를 하는 이유

언제부턴가, 삶을 살아가면서 만나서 교류하는 사람들에게 질책보다는 격려를 많이 하고 있다는 것 같다. 모호한 표현을 쓴 이유는 앞선 문장이 내 자신의 것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기 때문이다. 격려보다는 좋게 봐줘서 그런 것 같다는 말이 좀 더 정확한 것 같다. 그런데 뭘 좋게 봐주는가 하면, 다른 사람에 대해서 좋게 봐준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 언제부터인가 자책이나 자기비하를 일삼는 사람들에게는 최선의 격려와 응원을 보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만으로 본질적인 문제 해결은 안 되지만 말이다.


 중용은 어렵다. 살면서 보면 자기애가 너무 투철한 사람이 있고, 자기 자신에게 너무 가혹한 사람이 있다. 양극단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자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흥미가 없지만, 후자에 대해서는 혹 교류를 하게 된다면 격려와 응원을 많이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 자신의 편이 아니기 때문에 지켜보는 입장에서 상당히 불안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에게 너무 가혹한 사람의 문제점은 자기 자신이 자신의 적이라는 점이다. 사실 자기 자신에게 엄격한 기준과 자아 성찰은 인격의 향상을 위해 매우 중요하지만, 비교하자면 자신을 사랑하되 매몰되지 않고 따끔하게 반성할 때는 반성하는 균형 잡힌 사람과는 처한 상황이 다르다. 자기 자신에게 너무 가혹한 사람은 언제나 잘해야 본전이다. 잘하는 것은 누구나 이 정도는 한다고 생각을 하고, 못하는 것은 이런 것도 못 한다고 자신감이 지각을 뚫고 맨틀까지 내려가 버리는 타입의 사람이다.


 이런 성격의 사람한테 타인이 가서 같이 질책을 한다? 그야말로 사람을 잡을 일이다. 굳이 안 그래도 된다. 이런 타입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제일 가혹하기 때문에 거들어줄 필요도 없다. 울고 싶은 사람한테 가서 뺨 때리는 짓은 무거운 업보를 쌓는 짓일 것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에게는 격려와 응원을 한다. 잘한 일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그것에 대해 평가절하하지 않도록 신경을 쓴다. 못한 일에 대해서는 "누구나 그럴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결국 돌고 돌아서 나 자신을 위한 일이 될 것이므로 이기적으로 따지면 자기 자신을 위해 하는 일이니, 손해가 아니다.


 실수를 자주 하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나 그럴 수 있다"고 말해준다. 기억력이 나빠지는 것 같다(그래서 실수를 했다면)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나 그럴 수 있다"고 말해준다. 부정적 피드백을 차단하기 위함이다. 실수를 많이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평범한 수준이든, 객관적으로 좀 심하다고 하든)이 그것을 자신만의 단점이라 받아들여 버리면 나중에 발생할 수 있는 실수에 대해 부정적으로 강화되어버릴 수 있다. 이것은 일종의 악순환이다.


 이야기하다가 은연중에 자기 비하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때는 조금 직설적으로 자학은 하지 마시라고 언급을 한다(따지듯이 X 친절하게 O). 자학이 나쁜 것은 누구나 의식적으로 아는 법이므로 큰 저항은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실패를 거듭하고 있어서 자책하고 있다면 나는 실패는 시도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점에 착안해서 시도를 하는 것에 대해 초점을 맞춰서 격려한다. 비록 실패했지만 그래도 계속 시도를 하는 것 자체도 멋진 일이라고 말이다.


 이런 간접적인 행위는 결국 자책하는 사람이 자신과 화해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으면 하므로 하는 것이다. 결국 자기 자신과 마주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은 뿐이다. 타인이 자기 자신과 마주하세요! 라고 해봤자 어떻게 하는지 모를 것이다. 마주해봐야 신랄하게 비판할 것 아닌가? 그래서 일단 타인이 할 수 있는 범주는 격려와 응원 정도밖에 안 되지만 그거라도 열심히 해보는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포용할 수 있는 것도 자기 자신 뿐일 것이니까.


 그래서 나와 교류하는 사람들에겐 최대한 은연중에 자책과 자학에 휩싸인 사람이 있다면 응원과 격려를 많이 하려고 한다. 그것을 통해서 자신에 대해 조금은 관대해지고 그렇다면 자기 자신이 타인과 같이 날을 세우는 적과 같은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제일 지지해주고 응원해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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