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아트원씨어터
2023년 5월 10일.
정말 딱 1년 전 오늘이다.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내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어버린 것만 같은, 뭔가 물리적인 것만이 아니라 화학 작용 같은 것에 가까워서 내 안에서 뭔가가 근본적으로 건드려지고 속성 자체가 바뀌어버린 것만 같은 날이 말이다.
작년 오늘의 날씨는 올해 오늘의 날씨만큼 쾌청하고 산뜻했다. 그야말로 봄날이었다. 오후 반차를 낸 나는 기분 좋은 날씨를 만끽하며 대학로로 향했다. 뮤지컬 <윌리엄과 윌리엄의 윌리엄들>(이하 <윌윌윌>) 마티네 공연을 보기 위해서. 뮤지컬을 애호하는 사람이기는 했지만 중소극장의 뮤지컬을 찾아볼 정도의 뮤덕은 아니었다. <윌윌윌>을 보러 간 것은 순전히 임규형이라는 뮤지컬 배우가 궁금해서였다.
임규형 배우가 궁금해진 것은 <팬텀싱어> 시즌 4 때문이었다. <팬텀싱어>는 성악, 뮤지컬, 국악, 팝 등 다양한 장르의 싱어들이 개인으로 참가하여 크로스오버 4중창을 결성해 나가는 프로그램이다. 원래 <팬텀싱어>는 엄마와 동생이 시즌 1부터 좋아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TV 프로그램 자체를 잘 챙겨보는 편이 아니라 늘 시큰둥하던 나는 시즌 3부터 본방사수를 했다. 시즌 3 본방사수를 하면서 싱어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구축해 온 탄탄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다채롭고 웅장하고 아름다운 하모니를 만들어내는 팀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는 것이 참 즐거웠다. 그 기억이 바탕이 되어 작년 3월 10일부터 6월 2일까지 약 3개월 동안 시즌 4가 방영되는 동안에는 엄마와 동생보다도 내가 가장 열심히 프로그램을 챙겨봤고, 그 과정에서 눈에 띈 참가자가 임규형 배우였던 것이다.
처음부터 임규형 배우가 눈에 확 들어왔던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봤던 클립 영상들이나 찾아 들었던 음원들 그리고 내 핸드폰에 하나둘 쌓여가는 캡처 사진들이 내가 천천히 규며들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증표였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아마 4월 말 혹은 5월 초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날이었을 거다. 그날도 무심결에 임규형 배우에 대해서 찾아보다가 대학로에서 뮤지컬을 올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원래도 뮤지컬을 애호하는 편이기도 하고, 화면으로만 접했던 임규형 배우가 실제 현장에서는 어떨지 너무나 궁금하기도 했고, 사실 앞으로 엄청나게 대성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서 지금부터 미리미리 봐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티켓 예매 사이트에 들어갔더니 좌측 사이드이기는 하지만 1열(A열)에 자리가 마침 하나 있길래 냉큼 잡았고, 오후 반차까지 이어서 쓴 것이다. 그렇게 해서 2023년 5월 10일 16시에 아트원씨어터 2관에 이르게 된 것이다.
처음 가보는 극장이라 쭈뼛거리며 들어섰는데, 너무 사이드가 아닐까 걱정했던 내 자리는 임규형 배우가 맡은 헨리가 주로 앉는 의자 바로 앞자리였다. 100분이라는 공연 동안 나도 모르게 나의 시선이 계속해서 임규형 배우만을 향했다. <팬텀싱어>에서도 노래천재라는 수식어로 계속 불렸던 탓에 노래를 잘할 것이라고는 예상했지만 이렇게까지 노래를 잘할 수 있다는 것이 경이로울 뿐이었고, 노래뿐만 아니라 연기를 너무나 잘해서 정말 헨리 그 자체가 무대 위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것만 같아 놀라울 뿐이었다. (그리고... 너무 귀엽고 잘 생겼더라고...) 규형 배우는 헨리가 재판정에서 불안해하고 초조해하는 것을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입술과 마른침을 겨우 삼켜내는 목울대와 가만히 두지 못하고 꼼지락거리는 손가락과 긴장해서 얼어버린 발끝으로 표현해 냈다. 그 모습에 나까지 함께 숨을 제대로 쉬기 어려울 정도로 긴장이 되었다. 오래되고 사소한 것들에서 무한한 상상력을 펼쳐내는 사랑스럽고 반짝이는 모습을 벅찬 목소리로 아름답게 노래해 냈다. 사무엘의 관심과 인정을 받고 싶어서, 사무엘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고 싶어서 시작한 거짓말의 파장이 점차 커지며 혼란스러워하는 것이 어두워진 표정에 너무나 잘 드러났다.
뀨헨리를 따라 웃고 울다가 공연장을 나서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 내 인생 망한 거 같은데?'.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공연장에 갔을 뿐인데 어떠한 정보도 기대도 없이 보게 된 <윌윌윌>은 내 인생 뮤지컬 중 하나가 되었고, 현장에서는 어떨지 궁금했던 참가자 중 한 사람이었던 임규형 배우는 내 최애이자 본진이 되어버렸다.
쉬이 공연장 주변을 떠나지 못하고 근처 카페에 들어가서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커튼콜 때의 규형 배우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헨리 그 자체가 되어 감정을 완전히 쏟아낸 이후라 그런지 긴장이 풀려 보이기도, 아직은 헨리의 감정에서 온전히 빠져나오지 못한 것 같기도 한 노곤하고 말랑한 모습으로 객석을 향해 폴더를 접듯이 인사를 꾸벅꾸벅하는 게 몇 번이고 재생되었다. 아, 오케스트라를 향해 에어 바이올린을 켜는 귀여운 모습도. 그렇게 한참의 시간을 보내고 속으로 생각했다. '... 이 사람에게서 헤어 나오기 쉽지 않겠군. 덕질은 처음이라 잘 모르겠지만 어쩐지 오늘 제대로 입덕한 것만 같아.'
2024년 5월 10일.
그렇게 1년이 지났다. '벌써 1년이나 되었다고?' 싶다가 '아직 1년밖에 안 되었다고?' 싶은 마음이 여전히 엎치락뒤치락. 오늘은 규형 배우 팬카페에서 알게 된 언니들과 한강 피크닉 하러 간다. 참... 1년의 시간이 이전에 상상도 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채워져 왔다. 그 시간들은 늘 새로웠고 충만하게 행복했다. 순간은 영원할 수 없겠지만 그 편린이라도 잡아놓고자 이렇게 하나씩 글로 남겨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