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29(월)
'오지 않을 것만 같던 마지막날이 기어이 오고야 말았다'라는 어쩌면 진부한 문장을 쓰게 되는 날. 그래도 전날 내가 지냈던 공간과 시간에 진하게 인사를 한 덕분인지 슬프거나 아쉽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마지막에 드는 시원하지도 않은데 섭섭하지도 않은 이 감정이 낯설었다. 가장 가까운 마지막을 떠올려봤다. 나의 첫 퇴사. 첫 회사를 7년 만에 퇴사하면서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로 출퇴근하지 않아도 되는 데다가 일더미에서 빠져나온다는 사실이 후련할 만큼 시원하기도 했고, 다만 마음 맞는 사람들과 더 이상 함께 일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섭섭하기도 했던 그때를. 마지막이라는 순간에 드는 감정이 이렇게나 다를 수 있다니. 이 차이는 대체 무엇이 만들어 낸 것일까. 후회, 아쉬움, 미련 등 갖가지 비교 기준을 떠오르는 대로 갖다 붙여본다. 이리저리 생각해 보지만 잘 모르겠다. 그저 부산에서의 시간이 충분했다는 것만 기억하기로 했다. 정말 잘 쉬고 잘 즐겼다.
커다란 짐가방 때문에 진땀 빼던 첫날의 경험 덕분에 기차표 예약을 하면서 짐캐리 서비스를 함께 예약해 두었다. 체크아웃 시간인 11시에 맞춰서 숙소를 나섰고, 부산역에 들러 캐리어를 맡겼다. 과거에 고생한 나 덕분에 지금의 나는 몸도 마음도 홀가분할 수 있었다. 서울로 향하는 기차는 오후 3시 26분 차였다. (애매한 시간이라고 생각했다면 그게 맞다. 금요일에 서울에서 부산으로 내려오는 기차의 표가 사라지는 속도만큼이나 월요일에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의 표가 사라지는 속도도 만만치 않음을 처음 체감했다. 시간에 구애를 덜 받는 것이 이렇게나 다행인 적이 또 있었던가.) 약 3시간 정도의 시간이 있었다. 내가 향한 곳은 부산역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중앙동의 굿올데이즈 카페였다. 굿올데이즈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된 것은 롱블랙 아티클을 통해서였다. 롱블랙 아티클에서는 '시간과 기록으로 과거가 될 지금을 간직하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우며 원도심인 중앙동의 반짝이던 옛 시절을 담아내고, 이곳에 머무르는 사람들의 현재 역시 언젠가 반짝일 한 시절로 간직할 수 있도록 다양한 경험을 설계해 둔 굿올데이즈 호텔에 대한 소개가 주였다. 그래서 셀프 유배지가 부산으로 결정되고 초반에 알아본 숙소 중 하나이기도 했다. 숙박비가 내 예산 범위를 넘어서기도 했고, 이미 예약이 가득 차 있기도 해서 결국 숙박하지는 못했지만 동일한 아티클에 한 챕터 정도로 소개되어 있던 1층에 있는 카페라도 가보자는 생각으로 방문한 것이다.
짙은 회색 벽돌 건물 안쪽으로 들어서니 목재 가구들로 따뜻한 느낌을 더한 널찍한 공간이 나타났다. 들어서자마자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공간 한쪽을 가득 메우고 있는 100장이 넘을 것 같은 엽서들이 전시되어 있던 것이었다. 커피와 디저트, 엽서 같은 문구류 등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한 이곳이 나의 셀프유배기의 마지막 장소라는 것이 기뻤다. 초당옥수수 치즈케이크와 아메리카노를 시키고 엽서들을 하나하나 차근히 살펴보았다. 모두 부산의 풍경을 담은 것들이었다. 셀프유배기 기간 동안 내가 방문했던 곳이 담긴 엽서들은 그날의 기억들을 하나씩 머릿속에 재생해 주었다. 내가 가보지 못한 풍경을 담은 엽서들은 이곳에 꽤나 오래 머물렀지만 여전히 알지 못하는 부산의 모습들이 있다는 것이 이곳에 대한 자만을 가지지 않게끔, 그리고 언젠가 저곳을 방문해야지 기대감을 가지게끔 해주었다. 엽서 구경을 한참 하다가 옆쪽 벽면을 보니 'Postcards to the Future 미래로 보내는 엽서'에 대한 안내글이 붙어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곳에서 엽서와 우표를 구입하면, 당일 기준 3년 후 미래까지를 엽서 발송일로 지정할 수 있었다.
또 한참을 엽서 앞을 서성이다가 마음에 드는 엽서를 사서 자리로 돌아왔다. 커피를 마시며 셀프유배기의 토대가 될 일기도 쓰고, 미래의 나에게 보낼 엽서도 썼다. 차분하고 고요하게 사각사각 펜으로 나에 대해서만, 나를 위해서만 글을 썼다. 이 시간을 꽤나 많이 그리워하겠구나 직감했다. 지금만큼은 어려울 수 있겠지만 일상으로 돌아가서도 이런 시간을 나 스스로를 위해 확보해 줘야지 생각했다. 혹시나 또 일상에 휩쓸려 지금의 시간이 흐려지고, 지금의 마음을 잊을 수도 있겠지. 그래서 지금의 시간과 마음을 담은 엽서를 1년 후의 내 앞으로 써두었다. 시간, 기록, 기억에 대한 가치를 담고 있는 굿올데이즈에서 나의 셀프유배기를 마무리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언젠가 그리워할 그날이 될 오늘, 아련하게 기억으로 사라질 오늘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도록, 사라져 가는 시간에 의미를 담고 싶었다.
- 굿올데이즈 호텔: 원도심 한복판의 호텔, 옛 부산의 기억을 공간에 담다(롱블랙)
사실 퇴사를 하고 부산에서의 한 달을 보내기로 하면서 설렘이나 기대, 들뜸 같은 감정보다는 불안이라는 감정이 더 컸다. 나 스스로 쉼이 필요하다고, 나를 마주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내가 자발적으로 내린 결정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정해진 트랙에서 튕겨져 나온 것 같아서 위축되기도 했고, 생산성에 대한 압박감을 느끼기도 했다. 셀프유배기를 쓰게 된 것은 그래서였다. '퇴사를 하고 글을 쓰거나 유튜브를 하거나 하는 게 국룰(?)이니까 여전히 정해진 트랙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야.', '이 시간은 흘러가고 흩어지겠지만, 글을 쓰면 어느 정도는 붙잡아둘 수 있을 테니까. 나중에 책으로도 엮어낼 수 있으니까 엄청난 생산성이지! 그러니까 불안해 말고, 글감을 위해서(?) 이 시간을 충분히 즐기는 거야!'라는 어쩌면 조금은 이상한 논리들로 나를 다독인 것이었다. 설득을 잘 시킨 건지, 설득을 잘 당한 건지 알 수 없지만 덕분에 부산에서의 26일은 좋았던 옛 시절로 남게 되었다. 회복의 시간, 행복의 시간, 다정의 시간, 새로운 경험의 시간... 고마운 시간.
이제는 굿바이, 마이 굿올데이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