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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호박 Aug 07. 2024

시야가 한층 트이는 시간

2024-07-24(수)~25(목)

기분 좋은 뻐근함을 느끼며 일어났다. '어제 서핑 다녀오길 정말 잘했어' 생각하며 집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면회객이 오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부산 셀프유배의 마지막 면회객은 관취1호 박사장님이었다. 박사장님은 나의 직장 동료이자 나의 사장님이기도 했는데,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일단 나와 박사장님이 처음 만난 것은 회사에서였다. 박사장님은 인사, 회계, 총무 등 회사의 살림을 총괄하는 경영기획실장님이었다. 박사장님은 주 2회 출근하는 유연근무를 하시며 내가 입사하던 해에 관악구에 독립책방 관객의취향을 오픈하셨다. 책과 커피를 좋아해서 종종 관객의취향에 놀러 가기도 했던 데다가, 내가 입사한 해와 책방 오픈한 해가 같아 내심 입사 동기(?)처럼 관객의취향을 생각하며 내적 친밀감을 차곡차곡 쌓아왔다. 그러던 2021년, 박사장님이 개인 작업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주말 책방지기를 구할까 고민 중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제가 할까요?' 했던 것이 시작점이 되어 박사장님과 함께 작년까지 관취7호 애호박으로 2년 반 정도 일했던 것이다.


나의 입사 동기(?)인 관객의취향은 어쩌다 보니 퇴사 동기(?)가 되었다. 2018년 3월 영업을 시작했던 관객의취향이 2024년 2월 영업을 종료한 것이다. 7년이라는 시간 동안 공간을 운영한다는 것은 어쩌면 그 공간에 매이게 되는 것이기도 해서, 박사장님은 관객의취향을 운영하는 동안 긴 여행을 떠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게다가 관취5호 복순이라는 강아지와 함께 삶을 나누고 계셔서 더더욱 어려움이 있었다. 이번 박사장님의 부산 행차는 관객의취향이라는 공간을 정리하고, 복순이를 돌봐줄 남편분과의 일정을 조율한 끝에야 이루어진 것이라 어쩌면 나의 셀프유배보다 더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걸 알기에 박사장님이 부산에 내려와 있을 1박 2일이라는 시간이 짧더라도 충만하게 쉰 시간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 컸다. 박사장님이 하고 싶은 것은 다 하셨으면 좋겠는 마음과 그래도 미리 부산에 내려와 있던 내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박사장님과 만나기로 한 피자집은 이전에 ㄷ님과 함께 갔던 피자집이었다. 덕분에 극악무도한 웨이팅 상황을 미리 알고 있어서, 박사장님이 도착하기 1시간 전쯤 미리 내가 피자집에 웨이팅을 걸어두었고 박사장님의 부산에서의 첫 식사를 아주 스무스하게 대접할 수 있었다. 맛난 피자를 든든히 먹고는 송정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출발할 때 갑작스레 비가 많이 내리길래 걱정했는데, 다행히 해수욕장에 도착할 때는 비가 멎어있었다. 날이 다소 흐렸지만 비가 와서 파도가 스펙터클 했다. 커피 한 잔을 사들고 들뜬 마음으로 파라솔과 돗자리, 튜브를 빌렸다. 사실 처음엔 워낙 일로 엮인 박사장님이라서 '단 둘이서 해수욕을 하면 어색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었는데 웬걸... 역동적인 파도에 신나 버린 나와 박사장님은 에버랜드 파도풀에 온 것처럼 꺄르르 신나게 놀았다. 파도에 하염없이 떠밀리는 서로를 보면서 웃음이 와르르 끊일 새가 없었다. 그러고 나서 생각해 보니 같이 워크샵 갔을 때 신나게 놀았었구나 싶어서 괜히 혼자 머쓱하기도. 내가 내심 하는 걱정들은 어찌 보면 제한하고 제약하는 류의 것들이구나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와 박사장님과의 관계를 잇는 일이라는 연결고리 말고도 다른 연결고리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의 관계를 바라보는 시야가 트이는 느낌이었다. 


우리의 손이 아직은 차가운 바닷물로 인해 파랗다 못해 보라색으로 질릴 때까지, 박사장님의 손이 쪼글쪼글해질 때까지, 나의 손등과 손바닥의 색 대비가 더욱 진해질 때까지 원 없이 물놀이를 했다. 돗자리와 튜브를 반납하고 샤워장에서 씻으려고 하니, 광안리 해수욕장과는 시스템이 달랐다. 광안리에서는 해변 용품을 대여했던 곳에서 2천 원을 내고 이용하면 되었는데, 송정 해수욕장은 키오스크에서 코인을 구입해서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코인 1개 당 천 원이라길래 광안리보다 싸다며 좋아했는데, 그 코인을 샤워기에 넣는 순간 폭탄의 타이머가 재깍재깍 돌아가는 것처럼 60, 59, 58... 숫자가 줄어드는 것을 보며 화들짝 놀라 얼레벌레 소금기만 겨우 씻어냈다. 이렇게 서바이벌 같은 샤워라니. 물 절약과 환경에는 도움이 조금 되려나 최대한 좋게 생각하며 찝찝함 위로 옷을 입었다. 


송정에서 출발하는 해변열차를 타고 미포까지 이동했다. 의도치 않게 전날에 서핑하러 와서 똑같은 루트로 숙소로 돌아간 터라 내가 바라던 것처럼 박사장님의 여행을 스무스하게 가이드할 수 있어 좋았다. 해변 열차의 창을 통해 보이는 너른 바다를 배경으로 물놀이하면서 느낀 거친 파도에 대하여, 조금 깊게 들어가다가 수상 구조원분의 호루라기를 불게 했던 것에 대하여, 서로의 손 색깔에 얼마나 놀랐는지에 대하여, 샤워기에 코인을 넣고 얼마나 당황했는지에 대하여 조잘조잘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녁으로는 엄청나게 푸짐한 물회를 먹고는 부른 배를 땅땅 두드리며 광안대교의 야경과 요트 떼의 요란뽀짝한 불꽃놀이, 산책 나온 털뭉치 멍뭉이들을 구경하며 첫날을 마무리했다. 


격한 물놀이에 어깨가 너무 아파 밤새 잠을 제대로 못 자서 힘들었다는 박사장님을 위해 둘째 날 아침은 약국에 방문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약을 사들고 박사장님이 픽해주신 대만식 중식당으로 향했다. 11시 30분 오픈 시간에 맞춰서 갔는데도 이미 내부가 꽉 차 있었고, 우리 앞에 웨이팅도 네 팀 정도 있었다. 다행히 평일 점심이라 웨이팅은 15분 정도 했다. 우리 뒤로 계속해서 웨이팅이 쌓이는 것을 보며 '대체 어떤 집이길래...' 싶었다. 비건, 베지테리언을 위한 옵션이 있어서 인상적이었다. 비건 딴딴미엔과 어향가지 튀김, 새우바오를 시켰다. 음식이 깔끔한 데다가 입에 착착 감기는 감칠맛이 좋으면서도 건강한 느낌이었다. 알고 보니 미쉐린 가이드에 오른 음식점이었는데, 너무나 납득이 되었다. 사실 맥주 한 잔 곁들였으면 딱이었을 텐데, 어깨 통증으로 진통제를 먹는 박사장님을 홀로 두고 마시기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점심을 먹고서는 커피를 마시러 갔다. 커피를 파는 공간이기도 했던 관객의취향 사장님과 함께하는 시간답게 카페 두 군데를 방문해서 술자리 1차, 2차 하듯 커피자리 1차, 2차를 했다. 커피로부터 피어오른 함께 관객의취향에서 일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각자의 일을 그만두고 난 후의 일상 이야기, 일상에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각자의 덕질 이야기 등을 나누었다.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박사장님의 근미래 계획 이야기였다. 박사장님은 빠르면 1년 후에 지역으로 이주를 할 계획으로 남편분도 얼마 전 전직을 하고 일을 배우고 계시는 중이라고 했다. 박사장님은 원래 전공이기도 하고 본업이기도 한 영상 제작뿐만 아니라 관객의취향을 운영하면서 갈고닦은 프로그램 기획, 원두 로스팅부터 드립까지 할 수 있는 커피 관련 기술, 식빵부터 케이크까지 구워낼 수 있는 제과제빵 기술, 평소 끼니로 해 먹는 한식부터 주변 지인들을 대접할 때 활용하는 양식 조리 기술까지를 활용해서 지방에서 지금보다 여유로운 삶을 꾸려가고 싶다고 하셨다. 수도권과 지방의 지역 격차가 점차 커지는 요즘, 지방자치단체들이 청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다양한 지원 사업을 활용해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시면서.


나는 지방에서 살다가 대학에 진학하며 서울로 올라왔다. 그래서 어디서 살든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서울에서 살아가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점점 서울이 아닌 곳에서의 삶을 벗어나 생각하지 못하게 된 것 같았다. 그런 내게 박사장님의 근미래 계획은 신선한 자극이었다. 박사장님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지금까지 여러 일을 하고, 특히 관객의취향을 통한 여러 경험을 쌓아오면서 내가 어디에 있든 나의 취향을 지켜낼 수 있겠다는 확신이 생겼어요. 그래서 지방으로 이주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어요.' 박사장님의 용기는 결국 스스로에 대한 깊은 이해를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그 말에서 느낄 수 있었다. 박사장님의 말을 통해 '그렇다면 나는 어떨까?' 하는 질문이 시작되었다. 박사장님처럼 나 또한 지방으로 간다면 나는 그곳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내가 지금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들을 계속해서 지켜낼 수 있을까 아니면 아예 내가 생각도 못했던 방향으로 나아갈까 등의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아직은 답을 내리기 막막한 질문들을 이제는 피하지 말고 차근히 마주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어떤 재능, 강점, 기술을 가지고 있을까?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취향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지속가능성이 있을까? 결국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기를 원하는 걸까? 나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어쩐지 답을 내놓는 속도보다 질문이 생겨나는 속도가 더 빠른 것 같지만 조급해말고 차근히 계속 마주해야지.


1박 2일 동안 함께하는 즐거운 시간과 더불어 지금의 내게 필요한 질문과 자극을 주신 박사장님께 정말 감사한 마음이다. 덕분에 시야가 차츰 더 넓어지고, 그동안 보지 못하던 것들을 조금씩 볼 수 있게 되는 것만 같다. 내년 이맘쯤엔 박사장님이 이주해 계신 곳으로 내가 피서를 가 있으려나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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