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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호박 Jul 07. 2024

내게 남은 건 그대

2024-07-06(토)

당일당일 일기 쓰기 뭔가 쉽지 않아서, 자연스레 어제일기처럼 쓰게 될 것만 같은 셀프유배기. 오히려 아침 시간 차분하게 글쓰기로 시작해 봐야겠다.


엊그제 본진의 첫 부산 공연을 보고 맑음언니와 함께 정말 엄청난 시간을 보냈다. 횟집에 들어서자마자 광안대교가 탁 트인 뷰에 놀라며 들어섰고, 정갈하게 차려진 상에 신선한 회가 나오니 술이 너무 달았다. 대화의 대부분은 본진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적당한 취기를 빌려 각자의 일상과 삶 그리고 그 안에서의 생각과 감정에 대한 이야기를 정말 가감 없이 나누었다. 그러며 서로 정말 신기해했다. 우리가 알게 된 지는 1년이 채 되지 않았고, 각자가 생애 첫 덕질을 시작한 것도 1년보다 조금 더 되었을 뿐인데... 1년 사이에 생긴 변화들을 되짚어보며 어리둥절 갸웃거리다가 이내 피식 웃게 되는 순간들이 참 많았다.


나는 사실 낯을 가리는 편인 데다가 의심도 많고 경계심이 있는 편이라 시간을 두고 천천히 신뢰 관계를 쌓은 사람에게야 겨우 편안하게 모든 것을 터놓고 말을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맑음언니에게는 정말 이렇게나 솔직히 말을 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와르르 쏟아냈는데, 그게 불편하거나 두렵지 않은 감각으로 내게 다가온다는 것이 정말 신기했다. 참... 시간이라는 기준이 중요하지 않은 요소는 아니지만, 어떤 관계에서는 초월이 가능하구나 싶은 생각에 기분이 참 묘했다. 즐겁게 이야기 나누며 한 잔 한 잔 기울이다 보니 어느새 시간은 4시간이나 훌쩍 지나가 있었고, 술병도 시간마다 한 병씩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과음을 하고 난 다음 날이었던 어제. 술병까지는 아니지만 컨디션 난조였다. '으으... 그렇지만 어제 너무 행복했으니 괜찮아. 공연 보러 가기 전까지만 컨디션을 좀 회복하자'라고 생각하며 침대에 내내 파묻혀있었다. 공연 1시간이 되기 조금 전에야 공연장을 향해 몸을 일으켜낼 수 있었다.


사실 공연장과 숙소의 거리는 도보로 10분도 안 될 거라 더 쉬다가 갔어도 되지만, 티켓 양도를 해야 하기로 해서 컨디션 대비 일찍 움직이게 되었다. 티켓을 양도해 드리기로 한 분은 다정님. 다정님께 티켓을 발권해 드리고는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가, 공연이 끝난 후에 다정님도 나도 별도의 일정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함께 저녁을 먹기로 했다. 역시 이틀 차에도 너무나 좋았던 공연이 마무리된 후, 다정님이 찾아주신 피자 맛집을 향해 전포동으로 향했다. 유명한 맛집인 만큼 웨이팅이 엄청나게 길었는데, 다정님께서 능숙하게 캐치테이블에 대기를 걸어주셨다. 근처에 내가 지도에 저장해 둔 카페가 있어 차를 한 잔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며 대기를 하니 시간이 금방 갔다. 다정님께서 찾아주신 피자집은 정말 맛집이었다. 고소한 치즈 맛이 가득한 피자를 나눠먹고, 다정님은 부산역으로 나는 숙소로 향했다.


다정님과 함께 보낸 시간은 정말 충만했다. 그리고 어제 맑음언니와의 시간과 겹쳐져서 울림이 두 배 세 배가 되었다. 맑음언니와도 다정님과도 웃으며 이야기했던 것 중 하나가 '정말... 평소대로 일상을 살았다면 옷깃도 스치기 어려웠을 분들인데, 덕질하면서 이렇게 만나게 되어 시간을 함께 보내고 관계를 맺게 된 게 참 신기하네요.'였다. 다정님과는 본진 팬카페에서 서로 닉네임을 인지하고 있다가, 작년 12월 대구 공연에서 종일반 중간에 카페에서 함께 시간 보낸 것이 계기가 되어 공연 때 한 번씩 이렇게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사는 지역도 다르고, 하는 일도 다르고, 연령대도 다른데 좋아하는 대상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나 다정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니.


작년에 처음 팬카페에서 표를 양도할 때, 좋은 마음으로 모인 곳에서 혹여나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면 어쩌나 전전긍긍한 적이 있다. 그때 표를 양도받으시는 분이 '원래 덕질할 때, 최애는 아티스트고 차애는 팬들이라고 하잖아요. 저는 규형님 좋아하는 분들이면 아묻따 믿어버려요.'라는 말을 해주셨다. 그날 이후 그 말을 내가 덕질하면서 만나는 분들을 대하는 태도로 삼고자 노력 중이다. 그리고 실제로 내가 경험해 본 사람들 대다수가 존중과 배려 그리고 다정함이 넘치는 사람들이었다. 어쩌면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결과 비슷한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기도.


작년 연말 커리어에 대해 불안정함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부터, 기어이 퇴사를 하고 부산에서 셀프 유배를 하고 있는 지금까지도 맑음언니와 다정님처럼 덕질하면서 만난 분들이 너무나 소중하고 감사하다. 고민과 생각이 많은 시기의 내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주시면서, 자신의 경험을 아낌없이 나눠주신 것이 늘 큰 힘이자 위로이자 실질적인 치트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긴 인생에서 어쩌면 이렇게 누군가를 좋아하고, 누군가를 좋아하는 누군가들을 만나는 것이 찰나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이 순간이 내 인생에 진한 잔향을 남기리라는 것 하나로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과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그 마음을 나누는 것을 더더욱 힘껏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정님이 어제저녁에 피자 사주신 것도 모자라 부산 유명한 빵집에서 샀다며 미니 크로와상 세트를 안겨주셨다. 그걸로 오늘 아침 해결, 어제 남은 피자로 점심 해결... 덕질이 밥 먹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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