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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호박 Aug 20. 2024

안녕, 나의 한 시절

2024-07-28(일)

공연, 약속 등 정해진 일정이 없는 날. 숙소에 하루종일 콕 박혀있을까 고민하다가 약 4주 간 다정한 동네가 되어준 전포에 마지막 인사를 건네야겠다는 생각으로 문밖을 나섰다. 이곳에 지내면서 종종 팸플릿을 통해 접한 <어나니머스 프로젝트> 전시를 보러 갔다. <어나니머스 프로젝트>는 사진 전시였는데, 제목처럼 특정 작가의 사진이 아니라 다수의 이름 없는 사람들의 사진을 테마별로 묶어낸 컬렉션이었다. 사진 옆에는 작품 이름이나 작가 이름이 아닌 사진 촬영 장소와 시기만이 적혀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진 속 장면에 더욱 집중하게 되었다.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사진을 찍은 사람은 이 순간을 왜 남기고 싶었을까?', '사진을 찍은 사람과 사진 찍힌 사람은 어떤 관계였을까?'와 같은 질문들을 한 장 한 장의 사진 앞에서 던지게 되었다. 이처럼 <어나니머스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사진을 컬렉팅 한 리 슐만은 '촬영자와 피사체 간의 관계에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진짜 아름다운 요소가 있다'는 것을 본 사진전을 통해 전하고자 했다고 한다. 전시를 보고 나오는 길에 문득 셀프유배기 동안 사진첩에는 어떤 사진들이 담겨있을까, 어떤 피사체와의 순간이 남아있을까 싶어 사진첩을 들여다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부산의 너른 바다였다. 서울과는 달리 부산에서는 바다를 정말 자주 볼 수 있었다. 해변을 거닐면서, 해변열차를 타고 앉아서, 오션뷰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에 술을 곁들이면서 멍하니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순간들이 많았다. 끝도 없이 펼쳐진 바다 앞에서는 왜인지 모르게 갑갑하던 마음 한 구석마저 스르르 풀리는 듯도 했고 걱정과 근심, 불안과 조급함 모두 아득한 바다 앞에서는 희미해졌다. 일렁이는 바다를 보며, 해안을 향해 부서지는 파도를 보며 그저 그 순간에 온전히 존재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면 지나간 일들이 생각보다 수월하게 정리가 되기도 했고, 앞으로의 일들은 마주하게 될 그때 고민하자며 스륵 넘길 수 있었다. 언젠가 '바다가 있는 곳에서 자란 사람은 호방한 마음을 품은 사람으로 자라난다'는 글을 본 적이 있는데, 그 말에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한 달이 되지 않는 시간 동안 마주한 바다가 내게 준 용기가 이만큼인데, 이곳에서 자라나고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어떨지 가늠이 되지 않기도 하면서. 


부산에서 했던 새로운 경험들을 담은 사진들도 많았다. SUP 보드를 타고 광안대교 너머까지 갔던 것, 진주부터 시작해서 남해-하동-사천을 지나 다시 진주까지 당일치기로 경남 드라이브를 했던 것, 시가바에서 시가를 경험해 봤던 것, 웻슈트를 입고 보드 위에 올라타며 처음으로 서핑을 해본 것, 내 이름의 의미를 담은 타투를 새긴 것, 디제잉을 하는 바에 가서 혼술을 한 것 등등 평소라면 주저하고 망설였을, 머릿속에서만 여러 차례 재생되다가 결국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을 경험들이었다. 이 경험들을 통해 나 스스로가 가지고 있던 틀을 하나둘 깨 볼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생각보다 더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울 수 있었다. 덕분에 조금이나마 나라는 사람이 확장되는 것 같았달까. 새로운 환경에 날 두니 새로운 경험에 마음을 기울이는 것이 조금 더 수월하게 느껴졌고, 새로운 경험을 통해 내게 차곡차곡 쌓인 긍정적인 감각들이 셀프유배가 끝난 이후에도 든든한 용기가 되어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산에서의 시간을 함께 나눈 다정한 사람들의 모습 또한 핸드폰 사진첩 속 격자를 채우고 있었다. 좋아하는 것을 함께 나누며 좋아하는 마음을 더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준 사람들, 서울/경기/세종 등 각자가 있던 곳에서 내가 있는 부산까지 한달음에 달려와준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 안쪽부터 따스해지더니 입꼬리가 자동으로 올라갔다. 사진으로 남지는 않았지만 부산에서 우연히 만나서 자신의 한 조각을 기꺼이 나누어주던 사람들까지도 떠올랐다. 사실 처음 부산에 셀프유배를 내려올 때에는 그 누구보다 나 자신과만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그랬고, 회사를 그만두고도 일상의 공간에서도 사람들을 꽤나 많이 만나다 보니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기가 어려웠다는 생각에서였다. 부산에 내려와서 물론 내가 필요로 하던 나 혼자만의 시간을 잘 보내기도 했지만, 그 누구도 만나지 않고 혼자로만 부산에서의 시간을 가득 채웠더라면 지금의 충만함은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부산에서의 시간을 함께해 준 사람들을 통해서 그동안 내가 세상을 바라보던 것과는 다른 각도로 혹은 내가 보지 못하던 세상까지를 볼 수 있는 넓은 시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 덕분에 나는 나 자신을 더욱 깊이 만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끝내는 내 배우와 <디어 에반 핸슨> 사진에 오래오래 눈길을 주었다. 나를 이곳 부산으로 데리고 온 장본인. 덕분에 너른 바다를 보며 해묵은 생각과 감정을 풀어내고 정리해 냈고, 새로운 경험들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며 용기를 얻었고, 다정한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며 세상을 바라보는 더 넓은 시야와 나를 들여다보는 더 깊은 시야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사실 규형 배우와 <디어 에반 핸슨>은 부산에서의 셀프유배 기간을 보내게 해 준 것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내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존재이기도 했다. 


뮤지컬 <디어 에반 핸슨>은 스스로에게 쓰는 편지로 시작되고 마무리된다. 첫 장면 'Be Yourself'에서 '디어 에반 핸슨, 오늘은 멋진 하루가 될 거야. 왜냐하면 오늘은 그냥 너답게 굴면 되니까.'로 시작되는 편지에는 에반 자신이라기보다는 에반이 바라는, 꿈꾸는 멋진 모습만으로 가득하다. 코너의 자살과 머피 부부의 오해로 인해 시작된 에반의 거짓말과 일련의 사건들이 지나간 이후, 마지막 장면 'Finale'에서 '디어 에반 핸슨, 오늘은 좋은 하루가 될 거야. 왜냐하면 오늘은 어떤 일이 있어도 너답게 굴 거니까.'로 시작되는 편지에는 비로소 에반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오롯이 받아들이고 더 나아가 미래의 자신을 닮은 아이들의 손을 놓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에반 곁을 지키는 것은 코너 프로젝트로 인해 아름드리 울창하게 자라난 나무 한 그루. 어쩌면 그 나무는 두 편지 사이의 시간 동안 에반이 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선택을 하고, 눈을 딱 감고 용기를 내기도 하고, 마음이 지나치게 앞서 실수를 하기도 하고, 자신이 어떻게 비칠지보다 상대방과 어떻게 맞추어갈지를 고민하며 관계를 맺어보고,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가는 자신의 실수를 바로잡아 보려고 애쓰기도 한 그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마주할 수 있게 된 에반의 성장기 그 자체로 느껴졌다. 그래서 매번 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무 곁에 서서 담담하게 자신에게 쓴 편지를 읊조리는 에반의 모습을 보며 많은 눈물을 쏟아냈고, 그 과정에서 치유가 되었던 것 같다. 


<디어 에반 핸슨>이 치유극이 될 수 있던 것은 에반이라는 인물을 그 누구보다 설득력 있게 해석하고 표현해 내어 전달해 준 규형 배우 덕분이다. 사실 <디어 에반 핸슨> 캐스팅 발표가 난 1월 2일부터 첫 공이 있던 3월 30일, 마음을 너무나 크게 울린 대레전 공연이었던 4월 26일, 서울 세미막과 막공이었던 6월 20일과 22일, 부산 첫 공이었던 7월 5일과 총막공이었던 7월 21일까지의 시간 동안 나는 회사에 있기만 해도 숨 쉬는 것이 답답해지고 때로는 나도 모르게 주룩 눈물이 흐르기도 했고, 긴긴 고민의 시간을 거치고 굳게 마음을 먹고서야 7년 간 다닌 첫 회사에 퇴사를 하겠다는 말을 겨우 뱉어냈고, 행정적으로는 퇴사가 되었지만 프로젝트가 끝나지 않아 책임감 하나로 꾸역꾸역 일을 마무리하기도 했다. 내가 선택한 퇴사임에도 무언가를 잃은 듯한 허탈함과 앞으로에 대한 걱정으로 인한 불안감이 들어서 무기력해지기도 했다. 그 어떤 일도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지쳐있었고, 그 어떤 누구와도 관계를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피로했던 것 같다. 이처럼 내가 가장 취약하던 시기에 규형에반이 전해주는 에반의 이야기와 더불어 규형 배우가 쌓아온 시간과 그 사이 보여준 모습들이 내게는 소중한 영감이자 용기이자 위로가 되어주었다. 첫 대극장 주연이 부담이 되었을 법도 한데 오히려 자신은 잃을 것이 없어 더 자유롭게 도전할 수 있다며 그저 최선을 다해 즐겁게 준비하겠노라던 모습, 오디션 때부터 '에반 그 자체'라고 불렸고 첫공 때부터 너무나 잘 해냈지만 회차를 거듭할수록 노래는 더욱 매끄럽고 수월하게 연기는 더욱더 세밀하고 섬세하게 다듬어가며 비로소 무엇을 더하지도 빼지도 않아도 좋을 무르익은 '에반 그 자체'가 되어가는 모습, 배우진과 창작진 등 함께하는 사람들과 돈독하게 관계를 쌓아가는 모습 규형 배우가 보여준 여러 모습들지쳐있던 마음을 다독여주면서 '내가 다시 일을 해나가게 된다면'을 그려낼 수 있는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7월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드림씨어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길가 가로등에 걸려있던 캐스트별 현수막은 이미 내려가 있었다. 어쩐지 허전해진 마음으로 건물 입구에 도착하자 메인 포스터는 다행히 아직 걸려있었다. 그 앞에 서서 한참을 포스터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내쉰 숨만큼 가벼워진 마음으로 손을 흔들고는 뒤돌아섰다. 입안에 머금은 작별인사가 내딛는 걸음마다 내 안으로 퍼져나갔다. 


'덕분에 행복했어, 무척이나 많이. 나를 위로해 줘서, 나를 성장하게 해 줘서, 나의 시절이 되어줘서 고마워.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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