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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호박 Aug 10. 2024

항해하듯 살아야지

2024-07-27(토)

"노가 있는 돛단배로 하시는 이유가 있으세요?"

"제 이름이에요. 제 이름이 바다의 배라는 뜻이거든요. 삶이 외부적인 환경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걸 돛으로 표현하고 싶었고, 그럼에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미미하더라도 성실하고 묵묵하게 행하고 싶다는 건 노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타투를 하고 싶다고 생각한 계기나 시점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타투의 영구적인 속성 때문에 무엇을 하고 싶은지는 꽤 오랫동안 고민했다. 그러다 내 이름의 뜻이 담긴 배를 새기면 좋겠다고 생각한 건 2, 3년 년 전쯤이었나. 그럼에도 낯선 경험에 대한 심리적 장벽, 영구적으로 남는 것이기에 정말 잘하는 곳에서 하고 싶다는 지나친 신중함, 잘하는 타투샵을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 잘 모를뿐더러 서치하는 것에 대해 귀찮아하는 미루미 특성 등으로 인해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고 늘 생각만 해왔다. 부산에 내려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부산의 바다를 바라보다가 문득 미뤄둔 타투를 해볼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지도 어플에서 검색을 해보니 숙소와 멀지 않은 곳에 타투샵이 몇 군데 있었고, 그중 후기 글을 통해 괜찮다 싶은 곳을 찾아 예약을 했다.


예약 당일, 긴장된 마음을 안고 타투샵으로 향했다. 타투샵이라는 간판도 표지판도 없어서 갸웃거리며 초인종을 눌렀다. 수염을 기른 타투이스트 선생님이 문을 열어주셨다. 쭈뼛거리며 들어서는데 흰색과 갈색털이 퐁실한 멍뭉이 단이가 꼬리를 흔들며 다가왔다. 초면인데도 엉덩이를 내어주는 단이 덕분에 긴장되고 쭈뼛거리던 마음과 몸이 스르륵 풀렸다. 타투이스트 선생님은 시원한 아이스커피를 내어주시면서 예약할 때 내가 요청했던 타투 디자인 시안을 세 가지 버전으로 준비해서 보여주셨다. 그중에서 하나의 선이 끊어지지 않고 파도와 돛단배, 노를 그려내고 있는 라인 타투를 선택했다. 사이즈와 위치를 최종적으로 정하고 난 후, 타투이스트 선생님이 위치에 맞게 디자인을 살짝 수정하셨다. 최종 버전을 잉크로 도장처럼 찍어낸 후 말리는 시간을 가졌고, 잉크가 다 마르자 그 위로 마취크림을 바르고 또 잠시 기다렸다가 본격적으로 타투 시술이 시작되었다. 타투를 할 때 약간의 저주파 치료받는 것처럼 이질적인 감각이 들었지만 얇은 라인 타투라 그런지 아프지는 않았다. 


실질적으로 타투하는 데에 소요된 시간은 10분 정도였는데, 타투샵에는 약 1시간 정도 머물렀다. 타투를 하기 전의 과정에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그 시간 동안 타투이스트 선생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오히려 좋았다. 내 타투의 의미로부터 시작된 대화는 내가 왜 부산에 내려오게 되었는지, 이전에는 어떤 일을 했었는지, 얼마 동안 부산에 머물렀고 어떤 경험들을 했는지로 이어졌다가 타투이스트 선생님은 언제부터 이 일을 시작했는지, 어쩌다가 타투이스트가 된 것인지로 연결되었다. 대화 사이사이 묻어 나오는 타투이스트 선생님의 삶에 대한 태도나 가치관 같은 것들에 공감을 하기도 하고, 배우게 되기도 했다. 간혹 아주 드물게 일면식이 없던 사람임에도 짧은 시간 안에 깊이 있고 충만한 대화를 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타투이스트 선생님과의 대화가 그랬다.


"어제 서울에 오랜만에 다녀왔는데, 사람들이 다 너무 바빠 보이더라고요."

"그렇군요. 제 친구들 중에서도 서울에서 직장 생활하는 친구들이 몇 있는데, 그 친구들도 서울 늘 정신없고 모든 게 바쁘게 돌아간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가만 보면, 세상이 바쁜 게 아니라 내가 바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바쁘기 때문에 세상이 그렇게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달까요."


마음에 쏙 드는 타투를 하고 민주님께 추천받았던 카페 중 한 곳을 방문해서 커피를 마셨다. 커피를 마시고는 을숙도문화회관에 예매해 둔 오페라를 보러 갔다. 초심자도 재미있고 쉽게 볼 수 있게 잘 풀어준 공연이었다. 공연장으로 향할 때 버스에서 바라본 낙동강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공연이 끝나고 낙동강하굿둑 위를 걸어보기로 했다. 한낮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잔열이 가득해서 걸음마다 땀이 주룩주룩 흘렀다. 그럼에도 해가 거의 다 져갈 무렵의 오묘한 하늘빛과 그 아래 바다라 해도 믿을 정도로 너른 낙동강을 바라보니 걸음마다 마음에는 바람이 통하는 것 같이 시원하고 개운한 느낌이었다.


문득 팔목에 새긴 나의 돛단배를 내려다보며 앞으로는 항해하듯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지금까지는 산을 오르듯 살아온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목표, 성취, 커리어 하이, 전성기 등 어느 한 꼭대기를 찍기 위해 위로 내달려 나가는 삶을 살기보다 때로는 바람을 따라 때로는 마음을 따라 항해하다가, 중간중간 우연히 만나게 되는 이런저런 섬들을 호기심을 가지고 둘러보기도 하고, 끝없이 펼쳐진 바다로 떠나는 모험 자체를 기대하는 삶을 살면 어떨까 생각했다. 내가 끝내 닿을 곳이 어딘지 몰라도 지금의 항해를 소중한 마음으로 즐길 줄 아는 삶을 살고자 노력한다면, 내가 바라보는 세상도 치열하고 숨 가쁜 곳이 아니라 흥미진진하고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곳이 되지 않을까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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