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태국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애현 Nov 03. 2018

여행, 기대와 욕심

#방콕일기 7. 아유타야 여행일기 2


내가 기대했던 아유타야는


막연히 언젠가는 가고 싶은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와 비슷한 느낌이지만 규모는 작은 곳. 자전거를 타고 둘러볼 수 있는 작지만 알찬 유적지. 그런 기대를 하면서도 아유타야 불상의 머리가 왜 잘렸는지, 건물들이 왜 무너졌는지는 알고자 하지 않았다. 아유타야에서 무엇이 유명하고 또 그곳에서 무엇을 봐야 하는지만 알았을 뿐.



시간이 갈수록 아유타야란 이름만 들어도 기대감이 커졌다. 무엇에 대한 기대인지 지금은 모르니만 아유타야에 가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여러 사원의 구석구석을 살펴보아도 내가 무엇을 기대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종내에는 아유타야에 뭔가를 기대한 나 자신에게 실망까지 했다. 왜? 무엇에 실망을 했지? 그리고 아유타야는 왜 내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않는 거야?


여행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 답은 여전히 찾지 못한 상태지만 나름대로 이게 답이 아닐까 하고 추측되는 건 있다. 한창 해외여행을 시작했을 때의 나는 빡빡한 일정을 선호했다. 어느 나라에 어느 곳을 가면 꼭 봐야 할 곳이 있었고 꼭 먹어야 할 것이 있었다. 그러나 여행의 횟수가 늘고 경제적으로도 조금 여유가 생긴 이후부터는 '이번에 보지 못하면 다음에 보면 되지 뭐' '이번에 못 먹은 건 다음에 먹지'란 생각으로 비교적 느긋하게 여행을 하기 시작했다. 여행지에서 꼭 무엇을 해야 한다는 기대감과 열정보다 여행지에서의 여유를 택했다.

그렇게 욕심을 버리고 진정 여행을 즐기는 여행자가 된 것이라 믿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을 찍는 것을 좋아하다 보니 은연중에 다른 열정이 생겨났다. '저걸 못 보고 못 먹는다고? 그렇다면 지금 가고 지금 먹는 것을 철저하게 파헤쳐볼래. 모든 것을 찍고 모든 것을 볼래.'

이번 여행에서도 그랬던 것 같다. 방콕에서의 하루를 오로지 아유타야에 쏟아부었으니 나는 아유타야에서 기깔나는 사진 한 장을 건져야 했다. 다이내믹한 에피소드 하나도 가져야 했다. 그러나 나는 기깔나는 사진을 찍을 수도, 다이내믹한 에피소드를 가지지도 못했다. 꼬박 두 시간을 기차로 달려왔지만 지하철을 타고 십여분을 달려갔던 곳에서의 경험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거다. 나는 여전히 욕심을 버리지 못한 사람이었다.



사실 아유타야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돌아보면 좋지 않았던 순간이 없다. 계단이 많던 사원 꼭대기에 올라 다른 이가 한참 바라보던 풍경을 이어 보았을 때는 행복하기까지 했다. 아마도 버리지 못한 욕심에 내 감정을 조작했던 듯싶다. '뭐 괜찮긴 한데 조금 부족하네.'라고.



참 웃기게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생각보다 별로라 말하면서도 부지런히 자전거를 세우고 사진을 찍었다. 조금 달리다 세우고 또 조금 달리다 세우고. 마음에 드는 사원이 생기면 자전거를 묶어두고 돌아보다 나왔다.



예전 같은 웅장한 모습이 거진 사라졌기 때문일까. 평소 가던 다른 유적지들보다 마음이 편하기도 했다. 조심스레 봐야 하고 밟고 지나가야 하는 부분이 없었다. (물론 충분히 조심하고 훼손하지 않도록 해야 하지만 그런 쪽의 이야기가 아니다.)





아유타야 둘러보기



누워있는 와불상을 보러 <왓 로까이쑤타람>으로 가던 중에 우연히 지나가게 된 현지인들의 시장을 만났다. 와불상을 보려면 아유타야의 메인 사원들이 있는 곳에서부터 꽤 오래 자전거를 타고 가야 하는데 그 고된 길에 시장이 있어 좋았다. 자전거가 있어 시장 안으로 들어가 보진 못했으나 이렇게 밖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주 오래전 정말 코흘리개일 때 다녔던 성남 모란시장이 생각나는 곳이었다.



<왓 로까이쑤타람>에 가기 위해선 코끼리 사육장을 지나고 곧 무너질 것 같은 나무다리도 지나야 한다. (최근에 갔을 땐 정말 다리가 아작 나서 통행을 막아뒀더라.) 그러고 나서도 더 달려야 하는데 그만큼 달려서 올만큼의 감동이 있는가 의문이 든다. 엄청 커다랗기는 했지만.



커다란 와불상 앞에 작은 와불상이 하나 있고 그 앞에는 더 작은 와불상이 있는데, 근처에서 금박을 사 직접 그 작은 불상에 붙여볼 수 있다. 그리고 꽃을 올리고 음식도 올릴 수 있으며 향도 필 수 있다.



와불상은 큰 감동을 주진 못했지만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길이 정말 좋기 때문에 한 번은 가보길 추천한다. 와불상보다도 와불상 가는 길에 기대를 하고. 만약 투어로 여행을 한다면 필수 코스 중 하나일 게다.



가볼만한 사원은 다 둘러보고 처음 갔던 <왓 마하탓 사원>으로 돌아왔다. 오전보다는 사람들이 적어서 조금 더 여유롭게 구경하고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선셋 투어가 인기 있는 만큼 아유타야에서 노을을 기다리기로 했다. 사원에 가만 앉아 P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우리가 점심도 먹지 않았단 걸 알았다. 하지만 뭔가를 먹자니 시간도 애매하고 우리의 상태도 애매해서 방콕 시내로 넘어가 제대로 먹기로 했다.



그리고 해가 지길 기다렸지만 어두워지기만 하고 내가 원하는 색의 노을을 보여주진 않았다. 이미 해는 사라졌기에 툭 털고 (사실은 미련을 덕지덕지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록 사원에서 불상과 함께는 아니지만, 배를 타고 건너다 강 위에서 혹은 기차를 타고 가다 멋진 하늘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은가. 그러나 자전거를 타고 돌아와 다시 수상버스를 탈 때라지도 하늘은 내가 생각한 색을 보여주지 않았다.



아유타야 기차역으로 돌아가는 길.


아유타야 기차역 맞은편 골목에 고양이들이 엄청 많았다.




1등급 기차 타고
다시 방콕으로


아유타야 기차역에 도착, 7분 뒤에 출발하는 제일 비싼 '1등급 스페셜 익스프레스' 티켓을 끊었건만 한 시간이나 연착했다. 기다리는 도중에 소나기가 내려 비를 맞기도 했다. 여기에 모기까지 많아 엄청 고생했다. 우리의 기차는 올 기미가 안 보이는데, 원래대로라면 스페셜 익스프레스보다 늦게 출발하는 15바트짜리 3등급 기차는 어느덧 떠나버렸다. 우리가 탈 기차는 345바트인데. 한참 후에 도착한 '스페셜 익스프레스'는 우리나라의 무궁화호보다 더 꼬질꼬질했지만 에어컨은 아낌없이 틀어주었다. 얼마나 세게 틀었는지 무릎을 끌어안고 가디건으로 최대한 몸을 덮었는데도 추웠다.


비록 출발은 늦었지만 그래도 3등급보다 훨씬 빨리 달리니까 방콕 시내에 도착하는 시간이 그리 늦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방콕 시내에는 (거의 모든 가게가 다 문을 닫는듯한) 오밤중에 도착했다. 왜냐. 잘 달리던 기차가 한참을 멈춰 서있었기 때문에. 멈춘 이유는 모르겠다. 알려준다 해도 태국어이니 아마 몰랐겠지. 시간을 헤아려보니 벌써 사십 분째 같은 곳이었다. 라오스에서의 사고가 떠오른다. 춥고 배고프고 몸이 무거웠다. 직원이 옆 프랑스인들에게는 이유를 말해주는 것 같았는데 왜 우리한테는 말해주지 않았을까. 프랑스인들이 '택시 블라블라 택시'라고 말하는 것을 보니 기차가 고장 나서 택시를 타고 시내로 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원래 도착 예정 시간보다 벌써 한 시간 반이나 더 지났는데도 아직 갈길이 남았다니. 지금 서있는 곳이 어딘지도 모르겠고 여기서 내려 택시를 탄다 한들 345바트나 냈는데 환불해줄 것 같지도 않고. 이럴 거면 그냥 15바트짜리 3등급 열차를 탔어야 해. 우리는 1등급과 맞지 않는다. 처음에 시원해서 좋다던 생각도 다 날아갔다. 배고프다고! 한 시간 이십 분을 같은 자리에 서 있다가 출발했다.


그리고 1등급 기차에 대해 하나 더. 피곤해서 기차에 타자마자 바로 곯아떨어졌다. 그러다 너무 추워서 깼다가 바닥에 작은 벌레 몇 마리를 보고 잠이 확 달아났다. 아무래도 바퀴벌레 같은데. 서울에 있을 때만 해도 바퀴벌레보다 곱등이가 훨씬 싫어서 바퀴벌레를 보고 기겁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곱등이가 안 보인다고 그사이 바퀴벌레를 기겁한다. 바닥에 벗어두었던 신발을 다시 신고 두 다리를 접는다. 이 와중에 또 신발이 시트에 닿으면 안 되니까 엉덩이만 시트에 놓고 두 다리를 꽉 끌어안았다. 길거리에서 보는 건 아무렇지도 않은데 이렇게 폐쇄적인 곳 그것도 내 가까이에서 몇 마리나 보다니 소름 돋았다.


3등급 기차가 훨씬 좋아!



후아람퐁역에 도착하자마자 뒤도 안 돌아보고 바로 MRT역으로 넘어왔다. 수쿰빗역에서도 역시 뒤도 안 돌아보고 나와, 이전에 봐 두었던 숙소 근처에 햄버거집으로. 아유타야에 있을 때만 해도 터미널 21의 해브 어 지드에 가서 태국 음식을 먹을 생각이었는데. 어쨌든 수제 햄버거집인데 가격도 1등급 기차에 비하면 비싸지 않고 맛도 괜찮아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어를 엄청 잘하는 직원이 있는데 그의 목소리가 나른하고 섹시해서 좋았다. 이 얘기를 몇 번 했더니 P가 고백하란다. 아무리 내가 금사빠라지만. 일본 드라마에서 많이 보던 느낌이라 일본인인 줄 알았는데 태국어를 쓰고, 영어는 진짜 잘하고 하여튼 힙해. 계산할 때 한국에 햄거버 가게 많지 않냐, 한국인들은 햄버거를 좋아하는 거 같다, 파타야나 치앙마이는 안 가고 방콕에만 있을 거냐, 한국인들은 파타야 많이 가는 거 같은데 그렇지? 등의 질문을 받았는데 내 영어가 짧아 고작 yes, ok, right 등의 대답밖에 하지 못했다. 여행할 때마다 영어 공부의 필요성을 느끼지만 이번만큼 절실했던 적이 없구먼.


2017년 11월 20일

캐논 EOS 6D

매거진의 이전글 3등급 기차 타고 아유타야까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