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애현 Mar 25. 2019

학자금 대출

갑자기 글이 쓰고 싶어서 #4


 스물넷, 일년의 휴학으로 남들보다   늦게 대학교를 졸업했다. 졸업과 동시에  이름 밑으로 졸업장과 함께 천팔백만 원의 빚이 생겼다. 당장 취업할 의지도, 하고 싶은 것도 없는 내게 취업을 해야만 하는 이유가 생겼다. 학자금 천팔백만 . 요즘도 크게 다르지는 않겠지만 내가 입학한   전쯤에는 대부분이 학자금 대출을 받았고 그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나도  거부감 없이 학자금 대출을 받았다.


 일단 당시 우리 집의 모토는 이랬다. <스무 살 이후로 자신의 일을 스스로 해결할 것. 대학 등록금은 입학금과 함께 처음 한 번만. 만일 재수를 하게 된다면 그 역시도 자신의 힘으로.> 스무 살, 나는 경제적으로 독립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이는 내 동생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어릴 때부터 부족함 없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쏟아부어주던 아빠는 내가 입시를 시작할 때쯤 이런 말을 했는데 나는 큰 반발 없이 알겠다 대답했다. 열아홉이 본 스무 살은 어른이었고 어른이라면 응당 자신의 일은 자신이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린 나의 담대한 포부였지만.


 다행히 나는 현역으로 합격했으나 불행히 나는 미대생이었다. 그것도 재료비가 배로 드는 공예과 학생. 기본 학비가 오백만 원 언저리였고 재료비는 학기마다 이삼백은 들었다. 입학할 때는 입학금도 있어 칠백만 원이 넘는 돈을 내야만 했다. 이 돈은 아빠가 내주었다.

 그리고 그해 겨울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첫 학비 이후로 정말 모든 경제적 지원이 끊겼기 때문이다. 아르바이트를 하기 전까지는 핸드폰 요금과 교통비 등은 내주었지만 아르바이트 시작 이후 이를 포함한 모든 용돈이 끊겼다. 그래서 휴학기간을 포함한 학교를 다니는 오 년 내내 쉼 없이 아르바이트를 했다. 하지만 아르바이트를 해도 오백이나 되는 학비를 내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서 일학년 이학기와 이학년 일 학기, 이학년 이학기 총 세 학기의 학비를 대출받았다. 어느새 천오백만 원의 빚이 생겼다. 여기에 재료비를 충당하기 위해 생활비 대출도 받았더니 총 천팔백만 원으로 빚이 불어났다.


 대출을 받을 때만 해도 공부를 위해 이 정도는 해야 지란 생각이었는데 어느새 커진 금액에 불현듯 두려움이 엄습했다. 뉴스에서도 학자금을 갚지 못하는 2, 30대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나도 무서워졌다. 내가 천팔백만 원이나 되는 빚을 다 갚을 수 있을까. 나는 아직 이십 대 초반인데 이 빚을 다 갚을 때쯤엔 사십 대가 되어있진 않을까. 빚을 줄여야 했다. 이학년이 끝날 때쯤에야 이런 생각을 했다. 아르바이트는 쉬지 않았지만 아르바이트를 하는 시간 외에는 대부분 학교에 붙어 작업을 했다. 전공에서는 좋은 점수를 받을 자신이 있었지만 교양 수업은 자신이 없었다. 성적 장학금 말고도 다른 수많은 장학금을 알아보았다. 우리 학교의 우리 과는 우리나라에서도 손꼽히는 곳이었고 그래서인지 관련 업계에서 장학금을 줄 때도 우선순위에 들었다. 그 덕분에 내 빚은 천팔백만 원에서 그칠 수 있었다.


 다시 스물넷, 내 빚은 천팔백만 원이었다. 더 이상 빚은 늘지 않았다. 이제 빚을 갚기만 하면 되었다. 일을 해야 했으나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스무 살부터 스물넷까지 쉬지 않고 일을 했다. 쉬고 싶었고 그렇게 일 년을 쉬었다.

 스물다섯, 학교에 조교로 취업했다. 일 년 동안 또다시 학교를 다녔다. 이번엔 돈을 내지 않고 돈을 받으며 다녔다. 학교 다니며 했던 아르바이트보다 적은 월급이었다. 이것으론 학자금 대출을 갚을 수 없었다.

 스물여섯, 첫 회사에 입사했다. 삼 년 반 동안 회사를 다녔고 월 이십만 원씩 학자금 대출을 갚기 시작했다. 이마저도 입사 후 일이 년이 지난 뒤에야 시작했다. 그리고 이 회사를 다닌 지 이 년 즈음되었을 때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갔던 동생이 돌아왔다. 학생이 왜 빚을 내면서까지 그리고 비싼 이자까지 내면서 공부를 해야 하는 거냐며 한탄하고 있을 때 동생이 말했다. "누나, 내가 천만 원 빌려줄 테니까 학자금 갚아." 무이자로 기한은 없었다. 당장 은행으로 달려가 천만 원을 갚았다.

 서른, 학자금 대출 사이트에 남아있던 빚 팔백만 원을 전부 다 갚았다. 첫 회사를 퇴사하고 퇴직금의 일부는 빚을 갚는데 쓰였다. 동생에게 갚아야 할 천만 원은 남아있었지만 이자를 내야 하는 빚은 전부 사라졌다.

 서른 하나, 빚은 백만 원이 되었다. 지난 일 년간 동생이 급할 때 몇 번의 돈을 대주었고 동생은 천만 원을 갚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하지만 엄마는 가족끼리라도 돈 관계는 깔끔하게 정리해야 한다 했고 동생 대신 엄마에게 돈을 주고 동생은 필요할 때마다 그 돈을 가져가기로 했다. 월 이십에서 월 오십으로 상환 금액을 늘려 꾸준히 갚다 보니 어느새 천팔백만 원이 백만 원이 되어있었다. 졸업한 지 칠 년 만이었다. 그리고 빚을 제대로 갚기 시작한 지 오 년 만이었다.

 아마도 5월 말이 되면 학자금 대출 상환 금액은 0원이 될 것이다. 나는 공예가가 아닌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고 학교에서 배운 것은 내가 돈을 버는데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미대 중 손꼽히는, 아직은 이름값이 살아있는 타이틀 하나를 건지긴 했지만 이 타이틀을 위해 나는 천팔백만 원이나 내었고 그를 위해 몇 년을 살았다. 아직도 학교 이름값이 중요한 우리나라에서는 꽤 괜찮은 타이틀이지만 나의 이십 대와 나의 큰돈을 쏟아부을 만큼의 값어치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이제 곧 빚쟁이에서 벗어난다.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아, 자유로워라.


작가의 이전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