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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애진 Jan 06. 2024

살림학으로서의 경제학

동네 커뮤니티의 화폐 실험

국악방송 라디오에 출연했을 때였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있으세요?"라는 물음에 나도 모르게 "안전하다는 감각을 가질 수 있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라고 답했다. 다양성이 표출되기 위해서는 시도하고 설령 실패해도 괜찮다고 믿을 수 있는 안전망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실물 돈이 복지가 된 사회다. '안전망 = 돈'이 당연한 공식이 됐다. 처음으로 부모보다 가난한 세대인 우리에게 안전망은 곧 부모의 자산 여부가 됐다. 가족에게 안전망의 역할이 과도하게 부여됐다. 처음에는 막연하게 화폐 없는 경제, 자급자족의 대안 사회를 꿈꿨었다. 지금은 지역 순환 경제, 커뮤니티 화폐를 고민하고 있다.  


1. 전목적적 화폐 이후의 상상: 연대경제

7,8월 두 달 동안 홍기빈 소장님의 <연대경제> 수업을 들었다. (사실 매번 일이 생겨 개근은 못했지만 마지막 오프라인 강의만큼은 놓치지 않았다) 마지막 강연은 단 한 장의 사진으로 시작했다. 화면에 띄워진 그래프는 북대서양 해수면 온도였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2023년에 이르러 급등한 빨간색 선. 북대서양 해류가 멈출 가능성을 시사하는 지표였다. 살기 위해서는 총체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우리가 다가오는 생태 위기를 극복하고 회복 재생력이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첩경이 바로 연대 경제다. 연대 경제의 비전은 설령 세계 무역 시스템, 금융 시스템이 박살 나더라도, 우리가 서로에게 의지하여 삶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경제 방식의 구현이다. 회복 재생력 있는 삶의 방식과 사회 방식은 가장 작은 단위인 풀뿌리 망부터 만들 때 가능하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entrepreneur 대신 entredonner다.


기업가를 뜻하는 영어 'entrepreneur'는 '사이'를 뜻하는 enter (=inter = between)와 가져가는 사람을 뜻하는 preneur(=taker )의 합성어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이에서 이득을 취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반면, 'entredonner'의 donner는 주는 사람을 말한다.  다시 말해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서로가 서로에게 주는  것이다. 우리의 목표가 재무제표 원리에 의한 당기순이익의 극대화 혹은 자산 가치의 증대가 아닌 '좋은 삶'이 될 때, 추출 경제에서 생성 경제로 나아갈 수 있다.


제아무리 훌륭한 담론도 일상 속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으면 힘을 잃는다. 거대한 담론일수록 구체적 행동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이상은 높게 하더라도, 실제로 해 들어갈 때는 쉬운 것부터 해야 한다. 이념이 아닌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을 현실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 몽상성 대신 구체성이 필요하다. 연대경제 수업을 마쳐갈 즈음, 새로운 실험을 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안받았다.



2. 동네 커뮤니티의 화폐 실험: 유어보틀위크

보틀팩토리에서 주최하는 유어보틀위크는 1년에 한 번 동네에서 열리는 ‘제로웨이스트 페스티벌’이다. 이 기간만큼은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는 문화를 만들고 있다. 2년 전 서포터즈로 연을 맺었던 나는 올해는 기획단으로 참여했다.


| 두 가지 고민   

    목표에 대한 고민: 유어보틀위크의 중심지인 연희동 일대는 이제 제로웨이스트 일상이 낯설지 않다. 빨대를 사용하지 않고, 용기를 가지고 다니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초기 보틀위크의 목표를 달성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대로 충분한가? 아니라면 다음 목표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 우리 동네가 더 나은 동네가 되려면 뭘 바꿔야 할까?
    자원에 대한 고민: 동네가 이미 가지고 있는 풍부한 자원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그때 보틀라운지의 한쪽 벽면에 무수하게 붙은 포스트잇이 눈에 들어왔다. 1년 전 보틀라운지에서 열렸던 돈으로는 살 수 없는 장터, ‘바꾸장’을 실험의 결과였다. 당시 돈 대신 물물교환을 하고, 음식, 생활 기술을 나눴다. 그 과정에서 동네 친구들의 다양한 재능과 기술이 발굴됐다. 제로웨이스트 실천과 돈으로 살 수 없는 우리 동네 자본과 연결 지어보면 어떨까?   


| 세 가지 영감   

    산골 마켓 나무 화폐: 경주 생산자 마켓 마카모디는 그곳만의 화폐인 '마카'로 모든 거래가 이루어진다. 별도 화폐를 만든 이유는 상대적으로 매출이 적은 예술가들을 배려하여 마켓 수수료를 동일한 금액이 아닌 매출의 퍼센트로 받기 위함이라고 했다. 또한 마카는 마켓 내에서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판매를 촉진하는 효과도 있었다. 이처럼 마카가 교환가치를 지닌 화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구성원들 간에 ‘합의’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문제는 전목적적 화폐: 홍기빈의 <어나더 경제사>에 따르면 고대부터 약 1만 년 동안 경제는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조달하는 것’이었다. 화폐는 가치 척도, 지불 수단, 교환 매개, 가치 저장 등의 기능에 따라 독자적으로 만들어져 왔다. 그런데 고작 300년 전 등장한 자본주의는 화폐와 권력을 결합해 희소성을 기반으로 한 단일 통화 시스템을 만들었다. 모든 기능이 담긴 전목적적인 화폐가 등장한 결과, 우리는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가는 사회에 살고 있다.   
    화폐 같은 탄소중립포인트: 종이 영수증 대신 전자 영수증을 발급하고, 텀블러와 다회용 컵을 사용하는 등 녹색 생활을 실천하는 것만으로도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는 탄소중립 포인트를 얻을 수 있다. 자본의 영역에 자연 자본을 포함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생태계가 다양한 종으로 이루어져 있듯 자본 생태계는 다양한 자본이 필요하다. 한정된 풀 안에서 금융 자본의 극대화는 곧 다른 자본의 고갈을 의미한다. 우리는 자본을 창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자본들을 소실하고 있는 것이다. 금융 자본만의 무한한 증식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진정한 경제는 금융 자본만이 아니라 다양한 자본을 바탕으로 재설계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돈은 경쟁과 희소성을 만드는 것이었지만, 앞으로는 협력과 커뮤니티를 만드는 것이 되어야 한다. 관계를 잇는 매개물이자 서로를 살리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시작은 작은 동네에서부터. 그래서 이번 기회에 가장 시도해보고 싶은 것은 커뮤니티 자본과 커뮤니티 화폐 실험이었다. 화폐로 환산되지 않던 동네의 비경제적 자본을 프로그램 형태로 가시화하고,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돈 대신 제로웨이스트 실천으로 쌓은 점수 ‘보틀’로 지불하는 순환 프로세스를 구상했다. 일상 속 작은 행동들이 다양하고 풍부한 동네 자본 생태계로 피어나는 상상을 하며 포스터를 그렸다. 쉽지 않은 기획이지만, 작은 동네에서 시작된 변화가 점점 확산되는 것을 보면서 희망을 품고 있다. 소수라도 참여한다면, 유의미한 실험이 되지 않을까?


정리하자면  

    궁극적 목적: 우리 동네의 ‘좋은 삶'  

    목표: 돈벌이 경제가 아닌, 살림살이 경제의 영역을 넓히자!   

    방법: ‘사적 소유 기반 경제’에서 ‘기여 기반 경제’로의 이행 실험  


그리고 11월, 서울 연희동에서 한 달 동안 유어보틀위크가 열렸다. 낯선 개념과 높은 장벽으로 참여가 저조할까 봐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의외로 프로그램 호스트 모집은 순조로웠다. 반려인의 추억이 깃든 옷을 수선하여 반려견에게 물려주는 ‘니옷내옷’, 입지 않은 스웨터로 겨울 모자를 만드는 ‘어글리햇’ 등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허물고 폐기물의 재생을 이끌어내는 프로그램도 더러 있었다. 동네 사람들과 동그랗게 둘러앉아 동그란 도넛을 먹으며 도넛경제학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도 가질 수 있었다. 다만 아직 보틀을 쌓을 수 있는 인프라와 기회가 부족한 상황에서, '보틀'로만 구매하는 방식은 접근이 쉽지 않았다. 첫 씨를 뿌렸으니 앞으로 무럭무럭 자라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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