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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라우닝 May 13. 2024

첫 술에 배부르겠냐만은

숱하게 많은 이력서를 보내서 어디서 전화가 온 것인지는 몰랐지만 일단 부재중 전화가 남겨진 번호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예상했던 대로 학원이었다!! 수학학원.  소규모의 , 일대일 지도를 하는 집 근처의 중고등대상 수학학원이었다. 아이 고등학교 시절에 잠시 보낸 적이 있었던 곳. 이력서에는 그런 점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학원에서 일단 한 번 면접을 보자고 해서 날짜를 잡았고 면접을 보았다.  


수학강사분이자 그 학원의 원장님인 분과 바로 면접을 보았다. 사실 다른 지원자에게 연락을 했으나 닿지 않아서 나에게 전화를 한 거라고 솔직히 이야기해 주셨다. 나도 과거에 이 학원에 아이를 보낸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 이야기를 듣더니 조금은 놀란 원장님이 사실 학부모를 직원으로 고용하진 않지만 지금은 상황이 어쩔 수 없으니 알겠다고 했다.


월-금 오후 2시에서 9시까지. 4대 보험은 제공되지 않음. 급여에서 3.3%를 제하는 프리랜서 대우.  

근무시간 중 휴게시간은 없음 등의 조건에 합의하고 출근하기로 했다. 중간에 휴게시간이나 저녁시간을 줄 순 있지만 그러면 그  쉰 시간만큼 더 일하고 가야 한다고 , 다들 그것보다는 쉬는 시간 없이 일찍 가는 것을 선호하더라며 내가 그렇게 근무하기를 원한다는 뜻을 은근히 전달하셨다. 사실 데스크 직원이 나 하나이니 휴게시간은 가질 수가 없겠지.  그나마 주말에 근무 안 하는 것이 (주말에만  근무하는 직원이 이미 있었다.) 어디냐 싶어 그러기로 했다. 중고등대상 학원들은 보통 주말에 하루는 근무를 요구하므로.


그렇게 나의 학원 생활은 시작되었다. 아무도 없는 학원에 처음으로 출근해서 문을 열어놓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 그 이후에는 원장님이 알려주신 대로 매뉴얼에 맞게 일을 했다. 학원 안 환경을 정리하고, 오전 중에 남겨져놓은 부재중 전화를 확인해서 다시 전화 걸기,  학원 비품을 정기적으로 확인해서 떨어지면 원장님에게 보고하고 , 커피 자판기의 커피와 프림 등을  채워놓고 ,  아이들이 등원하면  출석확인기계에 번호를 입력하게 해서 등원확인문자가 나갈 수 있도록 확인하고,  수업료를 내러 오는 학부모의 카드를 받아 결제를 하고, 학원비를 내지 않는 학부모에게 문자를 보내거나 전화를 하고....


모든 업무들 중 가장 새로웠으며 긴장되었던 것은 카드 결제 업무. 어디에 가든 카드를 내미는 입장이었는데 이제 내가 카드를 받고 금액에 틀림없이 결제를 해야 하는 입장이 된 것이다. 카드결제 취소하기, 영수증 용지 떨어지면 다시 채우기 등등을 익히면서 신기한 기분이었다. 처음에는 누군가 앞에서 카드 결제를 기다리고 있으면 떨리고  많이 긴장되기도 했다


내가 느끼는 업무의 중요도와 상관없이  나의 학원 업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학원으로 걸려오는 문의전화를 받아서 친절하고 자세하게 학원수업안내를 하고 기록을 남겨놓는 것이었다. 실제 등록으로 이어지면 가장 좋겠지만 우선은 정보를 잘 받아놓고 원장님이 알게 하는 것이었다.


어찌 되었든 업계 무경력의 전직 전업주부인  나를 받아준 학원이 고마워서 열심히 일했다. 항상 출근시간보다 조금 이르게 출근했다. 학원데스크 직원이 나 혼자이니 자리 비우는 것이 걱정돼서 화장실에 갈 때도 전력질주 속도로 다녀왔다. 아이가 문과이었어서 이과수학은 잘 모르니 자료를 찾아 공부를 하고 입시에 관계된 기사나 자료도 틈틈이 찾아보았다. 담배를 피우다가 들어온 남자선생님들에게서 나는 담배냄새쯤은 티 내지 않고 참아냈고 학원비를 내지 않고 잠수(?) 타는 학부모들에게 끈질기게 연락하는 것 정도는 예삿일로 여겼다.


과거 광고회사에서 기획자로 일하며  겪었던 갖가지 험한 일들을 떠올리며 이 정도는 애교지 하며 넘겨보려고 했다. 시킨 일 외에도 내가 할 수 있는 일, 해야 하는 일은 없는지 살펴보며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장 맘에 걸리는 점은 강사분들이 오가며 풍기는 담배냄새도, 저녁을 9시 퇴근 후에야 먹을 수 있다는 것도, 무례하게 구는 학부모들도 아니었다.  언제인가부터 수업문의나 학원으로 걸려오는 전화가 점점 줄어든다는 것 그것이 가장 큰 걱정이었다. 일하기 시작했을 때에는 이 정도로 전화가 뜸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외려 내가 온 이후부터 문의전화가 줄어드는 것 같아 알게 모르게 위축되었다.  학부모 문의전화 기록을 적어놓는 공책 칸이 점점 비고 그 페이지를 바라보는 원장님의 얼굴은 더 어두워졌다.


직장에서 일이 너무 많아도 스트레스지만,  일이 없어도 스트레스. 일하고자 하는 나의 의욕은 충만했으나 학원의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좌불안석에 가시방석.  그러던 어느 날  평소보다 일찍  출근하신 원장님이 할 이야기가 있다며 나를 부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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