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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매한 인간 May 04. 2020

76. 나, 지금까지 정말 잘 해왔구나.

<나, 지금까지 정말 잘 해왔구나.>


카페를 운영하는 사장, 그리고 그 카페를 방문하는 손님. 그 둘 간의 관계는 무척이나 '깔끔'하다. 손님이 요구한 물품을 주고 그것에 대한 대금을 받는 계약관계만이 전부다. 손님이 주문한 음료를 만들어주고, 그만큼의 돈을 받는 행위가 둘 간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일의 전부다. 그런데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이 상황은 정해진 계약행위를 넘어서버렸다.


"사장님, 이거 선물이에요. 생각나서 사 왔어요"


샛노란 프리지어. 나는 당황하며 손님께 프리지어 한 단을 건네받았다. 수레에 꽃을 한 가득 싣고 아파트를 도는 아저씨가 있는데, 그 아저씨에게 꽃을 사 왔다는 손님. 그 이후로도 꽃말이라던지, 꽃 오래 보관하는 방법이라던지 여러 이야기를 해주는데, 내 귀에는 통 들어오지 않는다. 그저 얼떨떨함. 그게 지금 내가 느끼는 전부다. '왜, 왜 내게 꽃을 준거지?' 나는 돈을 벌기 위해서 손님을 '손님'으로 대했다. 나 먹고살자고 '손님'에게 넉살 좋게 인사한 게 전부다. 철저하게 영업용 가면을 쓰고, 커피값으로 받은 비 용안에 포함되어 있는 '친절'을 서비스로 드렸을 뿐이다. 내 손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프리지어가 너무도 눈부시게 아름답다. 프리지어도, 내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저 손님도 너무 아름다워 그저 미안하다.

 

그리고 며칠 뒤, 카페에 두어 번 방문한 적이 있는 손님이 늘 그랬듯 아메리카노를 시킨다. 얼음 가득, 물 조금, 투샷을 기억하고 있다가 그대로 전해준다. 손님은 아메리카노를 받자마자 물물 교환하듯 내 손에 쇼핑백 하나를 들려준다. 그러곤 "저 가고 나서 열어보세요!"라고 말하고 도망가버린다. 혹시 쓰레기를 버리고 가는 건가 싶어 한숨을 쉬고 열어본다. 그런데 영 생뚱맞은 게 들어있다. 유리컵과 작은 카드. 


사장님! 사장님이 튤립을 너무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요.
다이소에 튤립 유리컵이 팔길래 냉큼 사 왔어요♡


그다음 며칠 뒤에는 동네 아주머니가 '내가 워낙 손이 커서!'라고 말하며 들고 온 약밥을 선물 받았고, 한 달에 한번 즈음 오는 손님으로부터는 블루베리를, 바닐라라떼만 시키는 손님으로부터 핸드크림을, 취직하고 오랜만에 놀러 온 취뽀 손님으로부터 떡을, 올 때마다 아이스음료를 시켜먹는 얼죽아*손님으로부터 책을 받았다.

*얼죽아 : 얼어 죽어도 아이스 음료


손님들로부터 선물을 받을 때마다 나는 참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에 휩싸인다. '왜 내게 이런 선물을 주시는 거지' 하는 의문 한 꼬집, 고맙고 감사하고 따듯하고 뭉클거리는 마음 한 꼬집, 조금은 신기한 기분 한 꼬집, 그리고 곧이어 닥쳐오는 씁쓸하고 미안한 마음 한 뭉텅이. 나는 '돈'을 받고 손님들이 주문한 음료를 준 게 단데, 그게 단데, 내가 이런 걸 받을 자격이 있을까?


그런 의문을 안고 시간이 흘러 오늘 또 단골손님으로부터 드라이플라워를 선물 받았다. 단골손님이니까, 용기를 안고 물어봤다.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숨기며 물어본다. "왜, 왜 주시는 거예요?" 손님은 무슨 대단한 말이 나올까 기다렸는데, 고작 저 질문이냐는 듯 웃으며 대답해준다.


사장님이 좋아서요.
커피 한잔도 마음을 담아 만들어주니까요.
여기 오면 커피를 마시는 게 아니라 마음을 마시니까요.  


곧이어 '아우, 두 손이 오그라드네! 근데 진심이에요!'라고 말하는 손님 앞에서 나는 그냥 왈칵 울어버린다.

나, 지금까지 정말 잘해왔구나. 내가 정말로, 진심으로, 온 마음을 다해 필사적으로 만들고, 지키고, 가꿔나가고 싶었던 그 '카페'를 만들었구나. 나 지금까지 잘 살아왔구나. 나 잘한 거구나. 



세상은 바쁘게도 지나가는데 이 곳은 그 흐름을 벗어난 듯 정적이고 고요하고 차분해요.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나에게 관심도 없는 사람들이 가득한 급물살 속에서, 여기만은 잔잔하고 따스해요. 샷 추가, 얼음 적게, 달달하게 혹은 씁쓸하게. 나의 입맛을 기억해줌에 감사해요. 머리를 바꾸셨네요? 오늘은 일이 힘들었나 봐요? 나를 알아봐 줌에 감사해요. '딸랑'하고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 순간부터, 나가는 순간까지 따뜻하게 환대해줘서 고마워요. 사장님이 좋아요. 커피 한 잔도 마음을 담아 만들어주니까요. 여기 오면 커피를 마시는 게 아니라 마음을 마셔요.  - 밀크티를 주문하며, 손님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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