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하자마자 오롯이 나를 위한 카페라떼를 한 잔 내렸다. 나는 얼어 죽어도 아이스, 일명 '얼죽아'파라서 오늘같이 쌀쌀한 날씨에도 무조건 아이스 카페라테다. 카페에는 잔잔한 커피 향이 돌고, 컵 안에서 짤랑 거리는 얼음 소리가 너무나 듣기 좋다. 테이블 위에는 카페라테가 담긴 얼음컵이 둥근 호수를 만들고 있다. 오늘따라 이런 풍경이 너무도 예뻐 보인다. 잔잔하고도 신난 재즈음악마저 공간을 가득 메우니, 이 8평짜리 서점&카페가 정말로 가득 찬 기분이다. 풍요롭고, 또 따스하다.
풍경소리가 짤랑 울리고, 손님이 들어온다. 나는 카운터를 벗어나 손님을 감싸 안는다. "오랜만이에요!" 손님, 아니 우리의 친구도 환하게 웃으며 내 등을 토닥여준다. "잘 지내셨어요?" 아주 오래 떨어진 가족을 만나듯 얼싸안고 있는 우리는, 불과 일주일 전에도 만났다. 하지만 일주일이 왜 이렇게 길게 느껴졌을까. 일주일 만에 만난 친구가 너무나 반가워 죽겠다. 늘 그렇듯 친구는 밀크티를 시켰다. 다만 바뀐 게 있다면 쌀쌀한 날씨 탓에 아이스가 아닌, 따뜻한 밀크티를 시켰다는 정도. 우유에 스팀을 쳐서 직접 만든 밀크티 시럽을 붓고 친구에게 가져간다. 달달한 밀크티, 그리고 시원한 카페라테와 함께 우리는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생각보다 짧아서 우리에게 큰 일상의 변화는 없지만, 소소하게 나눌 수 있는 이야깃거리들이 참 많다. 최근 근 가본 맛집 이야기라던가, 요새 뱃살이 안 빠진다던가 그런 이야기.
어느새 우리는 '어린 시절' 이야기까지 나누게 되었는데, 특히 어렸을 적 부모님의 직업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친구는 어렸을 때 부모님이 문방구를 하셨다. 다니던 초등학교 바로 앞에서 문방구를 운영했는데, 문방구 이름도 친구의 이름을 따서 'A문방구'라고 지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친구들이 'A문방구'에서 '문'을 빼고 부르더니 'A방구'라고 놀리는 것이 아닌가! 그때부터였던가. 부모님이 문방구를 한다는 게 지독히고 싫었던 게. 별거 아닌 사소한 이유지만, 그때는 왜 그렇게도 싫었을까. 생계를 위해 부모님이 선택한 일을 왜 '싫다'라고 했을까. 웃기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던 지난날이 떠오른다.
나 또한 친구랑 매한가지였다. 난 사실, 아빠가 군인이라는 게 너무도 싫었다. 아주 어렸을 때, 그러니까 초등학생 저학년까지만 해도 군복 입은 아빠가 참 멋져 보였다. 아빠와 함께 TV를 보면 주로 무협영화를 보곤 했는데, 엽문의 견저단, 도신의 주윤발, 취권의 성룡이 다 아빠처럼 보였다. 가만 보면 닮은 구석도 꽤 많다. 그래, 아빠란 존재는 정말 한 없이 커 보이고, 멋지고, 자랑스럽고, 또 우러러보게 되는 것만 같다. 하지만 언제부터였을까? 아빠의 직업이 싫게 느껴진 순간, 아빠가 한없이 작아 보였던 순간. 그게 언제였을까?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그건 바로, 아빠가 손가락을 꺾여온 그날부터였다.
저녁을 먹기 위해 엄마와 집에서 아빠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따라 아빠의 퇴근시간이 늦었다. 테이블 위의 된장찌개는 식어만 가는데 아빠는 오지 않는다. 엄마가 국을 가스레인지에 다시 올리고, 데우길 두어 차례 반복하고 나니 아빠가 도착했다. 왜 이렇게 늦었냐고 물어보는 엄마를 외면한 채 아빠는 "씻고 올게"라는 한마디만 던지고 방으로 휙 들어간다. 타닥타닥 가스레인지 켜는 소리가 다시금 들리고, 나는 엄마가 주는 수저와 젓가락을 받아 들고 테이블에 올린다. 수저는 오른쪽, 젓가락은 수저 옆에 왼쪽으로. 가지런히.
온 가족이 둘러앉아있는 식탁은 그날따라 고요했다. 엄마는 항상 '어른이 수저를 들고나면'이라는 말을 했던지라, 나는 아빠가 수저를 들길 기다리고 있었다. 아빠는 어정쩌정한 모양으로 수저를 들었지만, 아빠의 수저는 테이블 위로 쨍! 하고 큰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엄마는 그때 문제가 있음을 직감하고 나와 동생에게 "먼저 밥 먹고 있어"라고 말하며 아빠와 함께 방에 들어갔다. 굳게 잠긴 방 문틈에서는 싸늘한 긴장감이 새어 나왔다. 동생은 상황도 모른 채 밥을 입에 넣고 있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동생이 참 밉게 느껴졌다. 잠시 후 방에서 나온 엄마와 아빠는 내게 동생일 맡긴 채 밖으로 나갔고, 한참 뒤 돌아온 아빠의 두 번째 손가락에는 붕대가 감겨있었다.
나는 엄마, 아빠가 맥주 한잔 기울이며 하는 이야기를 통해 사건의 전말을 듣게 되었다. 군대는 철저하게 계급제다. 당시 상사인 아빠에게는 원사인 바로 위 상사가 있었다. 그는 평상시 주변의 험담을 굉장히 많이 하고 다녔었는데, 아빠는 매번 그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고 한다. 그러다가 그는 '왜 내편을 안 드냐'라고 하며 아빠의 손가락을 꺾었다는 것이다. 아빠는 손가락을 꺾인 것보다 더한 고통을 주는 치욕을 감내할 수 없었다. 견딜 수가 없는 모욕에 상사를 신고하기로 마음먹었지만, 문 앞에서 결국 노크 한번 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곧 진급인데', '곧 월급이 오를 텐데' 이 생각, 하나가 아빠를 멈춰 서게 했다. 엄마는 그런 아빠에게 차마 '그까짓 거 그만둬!'라고 속 시원하게 말도 못 했다. 그저 서로를 위로하고, 또 다독였다. 그저 '버티자', '조금만 더 힘내보자'라고 속삭였다.
그런 엄마와 아빠의 모습에 어릴 적의 나는 분노했다. 부당함을 견디는 저 모습이 보기 싫었다. 아픈걸 아프다고 말하지 않는 부모님이 답답했다.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는 모습이 속상했다. 나는 그 뒤로 조금씩 틀어지기 시작했다. 관사에 사는 다른 이웃집 이모에게 반찬을 가져다주는 엄마를 보고 '내조하는 거야?'라고 했다가, 매몰찬 엄마의 시선을 받았다.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로 상사의 비위를 맞춰주는 아빠를 보고 '왜 그렇게 까지 하는 거야?'라고 했다가 아빠의 허탈한 웃음을 듣기도 했다. 이런 나를 보고 엄마는 '너도 너 같은 딸 하나 키워봐야 정신 차리지'라고 했었다.
시간이 흐르고, 이제 나는 성인이 되었다. 삶에 부조리함은 빠질 수 없는 양념 같은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재미없는 상사의 아재 개그에도 웃고, 경청한다는 포즈를 취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뭐만 하면 '넵'만 발사하는 '넵'병 직장인이 되었다. 그러다가 견딜 수 없어 퇴사를 했고, 인생은 퇴사할 수가 없어 지금의 서점&카페를 차리게 되었다. 서점&카페 4년이라고 사회의 매서운 맛을 모르는 건 아니다. 지금도 치열하게 삶을 살아나가고 있다. 이런 나에 비해 아빠는 35여 년의 시간을 군대라는 조직에서 버텨왔고, 엄마 또한 아빠 옆에서 늘 함께해왔다. 삶은 이다지도 쉽지 않아서, 살아가는 게 가끔 정말 눈물 쏙 나게 힘들어서. 자꾸만 부모님의 삶이 떠오른다. 닮기 싫어했던 부분마저 닮아가고 있다. 한없이 작았던 부모님의 모습이 사실 큰 풍파를 견뎌온 무척이나 큰 모습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존경스럽다"라는 한마디로 우리의 대화를 마무리해본다. 우리도 현재 우리 아이의 '부모님'이 되었다. 우리도 우리네 삶을 열심히, 잘, 치열하게 살아냈을 때 '존경스럽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겠지. 남아있는 밀크티, 그리고 카페라테를 단숨에 해치우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 손님은 집으로, 나는 여기 서점&카페로. 각자의 자리에서 오늘도 잘 살아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