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렌즈> 책과 함께하는 티키타카
여러분이 생각하는 친구의 모습은 어떤가? 나는 친구란, 그것도 진정한 의미의 친구라면 침묵이 편해야 한다고 여긴다. 고요한 침묵의 시간에 어떠한 말이나 행위로 채워 넣는 것이 아닌, 그저 가만히 있어도 편안한 그 관계. 그것이야말로 진정 친구가 아닐까? 그런데 오늘 나는 이 '친구'라는 단어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봐야겠다. 친구, 이 친구라는 범위에 우리 가족도 넣어보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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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를 사귀는 것, 인맥을 넓히는 것, 폭넓은 네트워크를 가지는 것.
이 모든 것이 삶을 잘 살아내는 하나의 방법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우리는 학교 친구, 동기, 선후배에는 그렇게 많은 감정과 시간을 쏟아내면서, 가족에게는 그만큼의 노력과 집중을 하지 않는다. 태어났을 때부터 주어진 이 인간관계가, 무엇이든 도와줄 것처럼 손을 내미는 이들의 마음이 어째서 당연스러운 걸까. 고든 던바의 <프렌즈>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모두는 똑같은 양의 감정 자본을 가지고 있다'라고. 사람들과 보낼 수 있는 시간과 양이 한정되어 있는데, 우리는 두루두루 폭넓은 인간관계를 위해 이 감정 자본을 타인에게 헌신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되려 고독감과 허탈감, 회의감을 느낀다. 상처 입은 우리는 가족의 온기 속에서 회복의 시간을 갖는다. 회복되고 나면? 또 뛰쳐나가 새로운 인간관계를 다지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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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든 던바의 <프렌즈>에서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인간의 가십 행위가 영장류의 털 고르기 행위와 매우 닮아 있다(...) 우리의 몸의 대부분에는 손질할 털이 없으므로, 우리는 그저 털 손질이라는 행위를 그것과 같은 효과를 지닌 쓰다듬기, 톡톡 두드리기, 껴안기로 대체했다' 가족 또한 내 인생에 있어서 친구이기에 잘 쓰다듬고, 톡톡 두드려주고 또 껴안아야 주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잠깐. 시댁은? 시부모님을 쓰다듬고, 껴안는다라. 다들 미간을 찌푸리며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한 멤버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시댁 문화, 시월드라는 이름을 붙여가며 고착화된 이미지를 만들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시부모님도 그저 인간대 인간으로서 마주한다면, 쓰다듬고 껴안는 게 무엇이 어려울까요. 그들도 우리 인생에 있어 한 사람의 친구인걸요." 그때 내 안의 모순과 마주해본다. 친구라는 범위에 가족을 넣기로 했으면서, 그 가족에 시부모님은 조금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들을 위해 시간을 내어주리라. 암묵적으로 모든 것을 허용받고 허용해주는 이들을 위해 마음을 쓰리라. 그들과 쫀득쫀득한 우정과 사랑을 나누리라. 우리는 인생의 친구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