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부엌이란 또 다른 의미의 '방'과 다름이 없다. 한 가족의 끼니를 책임지기 위해 아침을 열고, 식탁에서 책을 읽으며 하루를 마무리하기도 하는 공간이다. 싱크대 쪽 하부장을 등의 지지대 삼아, 방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잠시나마 멍 때리기도 할 수 있는, 내 틈틈의 시간에 짜임새 있게 들어왔는 곳이 바로 '부엌'이다.
집에서 부엌이란 실로 복잡 미묘한 감정이 드는 공간이다. 부엌은 내게 수많은 감정을 선사한다. 제일 먼저는 바로 분노, 분노다. 나는 설거지만 하면 배가 축축이 젖어있곤 하는데, 스스로가 너무 조심성 없이 덤벙거려서 그러는 거라 여겼다. 하지만 이제 생각해 보니 그건 분명 분노의 결과물이다. 부엌에서의 언어는 '말'로 행해지지 않는다. 찬장을 쾅 소리 나게 닫고, 설거지할 때 그릇들이 달그락달그락 거세게 부딪히는 소리가 바로 부엌의 언어다. '왜 요리는 자연스럽게 내가 해야 하는 걸까?'로 시작하는 회의는 시댁과 며느리의 관계, 남녀불평등, 사회에 대한 억압과 부조리까지 이어진다.
쾅쾅! 달그락! 쨍! 나의 언어를 들은 남편은 눈치를 보다가 어물쩍 어물쩍 부엌에 들어온다. "내가 설거지를 할까?"라고 묻는 남편에게 '그럼 요리도 내가 했는데 설거지까지 하랴? 당연히 해야지'라고 속으로 짖어본다. 이제야 부엌을 차지하고 있는 남편의 등을 바라본다. 그가 설거지하는 방식, 그릇을 쌓는 순서, 찬장을 정리하는 방법 그 모든 게 나와 다르다. 내가 그동안 부엌에서의 시간을 보내며 지켜왔던 질서들이 흐트러지는 순간 '난감함'이 몰려온다. 설거지를 끝냈다고 말하는 남편에게 나는 눈을 부라린다. '음식물 쓰레기는 망에 그대로 있고, 싱크대 양옆은 물이 철철 넘치네' 부엌을 맡기고 싶지만 온전히 맡길 수 없는 상황이 화가 난다. 어설프게 부엌을 차지하고 있는 저 남편을 부엌에서 몰아내고 싶다.
카페&서점에서의 부엌, 즉 주방은 긴장감이 엄습하는 공간이다. 나 이외의 누구도 허용할 수 없는 공간이다. 마트에서 싱싱한 야채를 사 오면 냉장고에서 잠시 보관하고, 쓰레기통으로 직행하는 그런 '집' 냉장고의 순환구조를 절대 따라서는 안 되는 공간이다. 유통기한에 철저하고, 식품 상태에 냉철해야 하고, 버리는 것에 과감해야 한다. 집에서의 언어표현이 절대 표출되어서는 안 된다. 나의 분노는 유리컵의 파손으로 이어지며, 그건 또 영업이익이 감소하는 결과이지 않은가? 쾅쾅! 달그락! 쨍! 하는 소리는 손님들에게 불쾌감만 줄 뿐. 그 어떠한 이득도 없다. 영업장에서의 설거지는 얌전하고 조용하다. 나의 존재마저도 조용히, 이 공간에 묻어나간다.
밖에서는 절제하고 참는다. 내 존재의 희미함이나 미미함은 아무렇지 않다. 그러나 집에서만큼은 달라야 한다. '나'라는 존재가 분명하고 뚜렷해야 한다. 내가 집안에서 하고 있는 일이 가족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일이라면, 그를 해주는 가족은 감사를 받아야 한다. 그게 내 존재감을 확인받을 수 있는 일이다. 내가 하는 일이 '허드렛일'이 아니라 애정으로부터 비롯된 일임을 확인받는 일이다. 나는 그게 꼭 필요했다. 일상의 배경이 되어버린 부엌에서, 나의 존재마저 배경이 되어가긴 싫어서. 지금까지 대부분의 엄마들이 그래왔듯, 나 또한 부엌을 나의 '방'으로 삼는 일이 싫어서. 그것에 대한 저항감으로 나는 오늘도 부엌에서 거친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