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의 능력
몸으로 말해요.
사람들은 몸짓 기호(언어)를 많이 쓴다. 청각보다 시각이 훨씬 많은 정보를 전달하기 때문에 몸짓을 보면 직관적으로 상황을 알아채게 된다. 그래서 ‘촉’이 영험한 것이며 ‘딱 보면 안다’는 말이 통한다. 비록 빈번하게 오해가 발생하더라도 말이다.
당근이라는 앱으로 거래할 때, 이런 신체 기호 읽기가 적극적으로 행해진다. 거래 장소에서 도착해 판매자를 찾을 때, 누군가가 쭈빗쭈빗하고 있고, 폰을 흘깃흘깃 들여다보며 손에 쇼핑백을 들고 있으면 80%의 확신이 온다. 그 후에야 ‘저,, 당근이세요?’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말이라는 것은 말하지 않은 것들을 다 파악한 후에 하는 확인사살이다.
한편으로 확인사살을 뭐 꼭 해야 하나 라고 하는 게 가족이다. 집에서는 몸으로만 말하는 사람이 많다. 일례로 나의 동거인의 몸짓 기호를 보자.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한다.-
----> 입이 심심하다. 근데 먹을 게 마땅히 없다.
서랍을 열었다 닫았다 한다.
----> 무언가를 찾고 있다. 안 찾아지니 도와달라.
안방에서 나와 거실을 가로질러 중문 쪽 까지 어슬렁 거린다.
-----> 어디 나가고 싶은데 밥이라도 나가서 먹자.
출근할 때 방문과 중문을 열어놓고 현관으로 나간다
-----> 내가 출근하니 자발적으로 나를 배웅해주면 좋겠는데 피곤하면 그냥 있던가.
커피를 내리면서 나를 힐끗힐끗 쳐다본다
-----> 너도 먹을 거면 조금 더 내리려고 하는데 커피 마실 거야?
커피를 내리고 커피 잔을 들고서 내가 있는 책상 쪽으로 왔다가 방으로 간다.
-----> 너의 것도 내려서 남겨놨으니 먹던가.
티브이를 보다가 나를 힐끗힐끗 본다.
-----> 밥 뭐 먹을 건데 지금쯤 밥해야 하지 않나?
외출할 때 안 나가고 뒤에서 머뭇거린다
----- > 너 아까 뭐 갖고 가야 한다더니 그냥 나가네 너 뭐 잊은 거 있을 거 같은데?
주머니에 손을 넣고 조금 뺏다가 다시 넣으며 나를 본다
-----> 너 줄려고 준비했어. 액수는 적지만 쓰던가.
그렇다, 나의 동거인은 어느 방향으로 어느 속도로 어느 순서로 걸어가느냐. 어떤 가구의 문을 여느냐. 무엇을 보느냐로 모든 대화를 한다. 20년에 가까운 나의 독해력으로 이제 ‘말해야 아나’라는 남편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누가 더 놀라운지 나원 참.
한편으로, 왜 음성 대화를 꺼려하는 것인가? 하는 질문을 할 수 있다. 남편의 본성이 그렇기도 하거니와, 요즘 읽는 <뉴미디어의 철학, 마크 포스터, 민음사>에서 발견한 바로는, 전자미디어로 하는 커뮤니케이션에 익숙해진 탓도 있다. 참고로 남편은 티브비광이다. 전자미디어로 하는 커뮤니케이션은, 단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티브이를 통해 전달되어 의미가 더 확장되거나 속도가 빨라지는 것 이상의 언어적 형식의 변화를 의미한다. 텔레비전의 예를 들어보면, 수신자는 발신자의 일방적인 메시지를 받는다. 하지만 수동적이지만은 않다. 그것을 능동적으로 구성하고 배치함으로써 커뮤니케이션 구조를 만든다. 홈쇼핑에서 물건을 산다면 선택하고 행위하는 것으로 물건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말이 필요 없다. 행위만 있다. 그것이 전자적 언어의 커뮤니케이션이다.
어쨌거나 오늘은 미디어 철학으로 남편을 이해해 보았다. 이것도 공부의 즐거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