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크기
같이 사는 동거인은 키가 크다. 키만 크랴 부피도 크다. 상대적으로 나는 작게 느껴지는 것이 동거인의 장점이다. 사람은 자기 크기를 디폴드 값으로 잡고 모든 것의 크기를 정하는 것일까? 가구의 크기. 빵의 크기. 집의 크기. 가방의 크기.
성장기 이후 한번도 다른 크기의 사람이 되어본적은 없지만 부피가 좀 늘어난 적은 있다. 그때 나는 날씬하다에 해당하는 몸무게 값을 더 올려잡고, 이전의 날씬하다의 값에 내가 찐 값을 더했던 것 같다. 그래서 살이찌고 나면 마른사람은 더 말라보였고, 통통한 사람은 그다지 통통해 보이지 않았다. 지금 마른 사람은 통통한 사람들이 더 통통해 보일 것이다. 모든 것은 자기 기준으로 판단한다. 보편적인 표준키, 표준 몸무게, 평균값이란 것이 무의미한 이유다. 자신의 신체의 상태가 자신의 자(척도의 기준)이다.
친구의 집에 놀러가면 점심을 대접할때 1인분으로 삼는 양이 다르다. 보통 우리가 식당이나 배달에서 1인분으로 시키는 양이 보편적 1인분이라고 잡아보자. 마른 친구는 샌드위치를 만들 때 식빵 두장 사이에 속을 넣은 하나의 샌드위치를 만든다음 반으로 자르고 그 잘린 반조각(내가볼땐 0.5인분)을 1인분이라고 말한다. 식당에 가면 늘 양이 많다며 자기랑 1인분 시켜서 나눠먹자고 한다. 반면 키도 부피도 큰 나의 동거인은 나와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 각각의 1인분을 시킨다음 자기의 1인분을 먹고 내가 먹고 있는 1인분의 반을 자신이 먹는다. 그에겐 1.5인분이 1인분이다. 처음엔 내가 남기면 남긴것을 먹더니 지금은 아주 내 그릇을 가져가 먼저 반을 먹는다. 참 누가 버릇을 잘못 들였나? (나군요)
보통 자신의 신체를 기준으로 모든 것의 크기를 정했을 것이다. 집이란 것도 바닥의 크기는 신체가 누웠을 때 크기를 기준으로 했을 테고 높이는 사용자의 키와 손을 뻗어 닿는 거리를 고려했을 것이다. 르꼬르뷔지에의 아름다운 모듈러를 떠올라보라!
하지만 신체의 스케일로는 부족하다. 사회를 형성하고 살아가는 인간은 상징의 가치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더 높은 지위의 사람을 드러내기 위해 더 큰집이 필요하다. 계층의 높이가 집의 크기가 된다. 집이 커지면 청소해야할 면적이 커지고, 손이 닿지 않는 곳이 많아진다. 그래서 많은 노예나 일꾼을 거느릴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도 되었다. 자본주의에서는 계층보다 부유함을 드러내기 위해 집 크기가 넓어진다. 내가 아는 부유한 어느 분은 팬트하우스 복층 백평정도에 노부부 두분이 사신다. 보통의 생각으로 그들에게 그 집은 너무 큰게 아닌가 싶겠지만 부유한 사람에게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 것 같다. 그 분은 집크기를 전혀 부담스러워하지 않으셨다. 자신의 부유함이 자신의 스케일을 결정한다.
현대인에게 돈은 자신을 확장시키는 도구다. 돈이 많으면 거인이 된것 같이 느껴지는 가보다. 그래서 사람에게 돈이 그렇게 유혹적인게다. 그러니 사람들이 '돈돈'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