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마을 동화

고향으로 가는 길-13

by 애린 이종희

어둑한 숲길 위에 앉아 있는 하얀 꽃잎을 발견하곤 한참 동안 주위를 훑어보지만, 꽃비를 날린 범인을 찾을 수 없다. 며칠간의 폭우로 질척거릴 거라는 예상과 달리, 낙엽이 흙이 되어가는 길은 너무 매끈하게 뻗어 있다. 몰라보게 장성한 소나무 등줄기에는 마삭줄이 예쁘게 터를 잡았고, 몸집을 늘린 담쟁이는 오랜 기생의 세월을 들킨다. 안개가 소복이 내린 몽환의 가파른 길을 오르느라 호흡은 거칠어도, 마음은 마냥 싱그럽다.


이 길을 따라 곧장 오르면 아버지 무덤이 있는 할머니 밭이 있다. 할머니랑 살던 어린 날, 잠시 다니러 오신 엄마 품에 잠들었다가 깨어나서는 너무 고요한 방을 급하게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흐릿한 이 길을 걸어 오른 산 언덕에서, 산과 한 몸으로 밀착해 있는 밭을 향해 목청껏 할머니를 부르고 엄마를 불렀다. 아무리 불러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세상이 갑자기 까매지는 순간이었다. 그 까만 길을 나비처럼 나풀거리며 날아서 내려왔다. 두려움에 끊긴 울음은 그런 것이라고 난생처음 알던 날, 날다 스친 가지에 베인 상처들이 곳곳을 쓰리게 했다. 그때 어른들은 자다가 사라진 나를 찾기 위해 허둥대며 새랍을 나서고 있었다.


수없이 오르내리며 눈으로 담아두었던 숲길의 옹이들은 빗물에 씻기고, 나뭇잎에 가려 지워지고 없다. 어두운 기억에 사로잡혀 뽑히지 않던 흉터들도 세월이라는 거대한 힘 앞에서는 쇠락해질 때가 있다. 정말 그래야 살 수 있는 거라고 말하고 싶은데, 진물난 과거에 무심한 바람은 없다. 하지만 슬픔이라는 감정이 탄생한 유년이 있어 지금 나는 가슴 뭉클한 고향의 공기를 흡입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동안 침묵이던 주위가 갑자기 왁자하다. 굵은 빗방울이 나무와 나무 사이에 스며든 아침의 표면에 투명한 빗금을 그린다. 드디어 동생이 만들어준 비닐 우비가 존재감을 드러낼 시간이다.





섬마을 동화



나는 일곱 살

오빠는 아홉 살


할머니 산밭에서

어른들이 캔 고구마를 들고

소나무 산길과 비탈진 언덕을 스쳐

반달 모양의 돌담을 휘어 돌아

새랍에 막 들어섰을 때


지상의 모든 덩이들이 한 곳에 부딪혀

서로를 하얗게 갉아먹는 소리가

할머니 집 마당으로 쳐들어왔습니다


그 소란에 눌린 오빠 목소리가

겨우 밖으로 빠져나와

우리가 옮겨 만든 고구마 동산 뒤

평상 밑으로 들어가자고 했습니다


“육이오인가 봐.”

“오빠, 육이오가 뭔데?”


바닥에 납작 엎드린 오빠가

학교에서 귀담아들은 공산당을

가지런히 꺼내놓고

단단하게 몽쳐 놓은 울음을

팡! 터뜨렸습니다


나는 왜 공산당이 오빠의 두려움을

뿌리째 파내게 하는 줄 모르면서

오빠처럼 두 손가락으로

눈과 귀를 틀어막고

하늘 높이 넝쿨지는 울음을 보탰습니다


갑자기 터져 나온 우리의 공포에 놀란 걸까요,

아니면 육이오가 바다를 건너지 못한 걸까요?


점점 말라 간 소리는

파리해진 하늘을 남기고

우리가 알지 못한 곳에서

뚝, 그치더니


나른한 포만감에 휩싸인

갈매기 한 쌍,

둥둥 떠 있었습니다





*새랍-(대문/금오열도 방언)


단편으로 읽으셔도 무리 없게 설정하였지만

프롤로그를 참고하시면 더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