믈라카는 소도시다. 둘러보는 데는 두세 시간이면 되는 곳이라 보통 당일치기 여행으로 많이 방문한다. 우리는 1박 2일 머물렀다. 16세기 포르투갈 인들이 세운 세인트폴 성당과 산티아고 요새, 140여 년간의 네덜란드 통치의 역사를 보여주는 네덜란드 광장과 건물들, 이른바 템플스트리트라고 하는 하모니 스트리트의 각종 사원들 등 몇 세기를 걸쳐 이어진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의 통치의 역사가 마치 계획도시처럼 축약돼 있는 믈라카를 아이의 속도로 찬찬히 거닐기 위함이다. 그리고 믈라카 강변의 밤길도 꼭 함께 걷고 싶었다.
이 즈음 하하의 양손에는 본드로 붙여놓은 것처럼 어딜 가든 장난감차가 꼭 들려져 있었다. 길을 걸을 땐 이국적 건물 벽면이 장난감자동차의 도로가 되었고, 산티아고 요새에서는 포르투갈 식민통치의 현장이 자동찻길이 되었다. 세인트폴 성당에 와서 장난감차로 흙장난을 할 거면, 여기까지 온 게 아이한테 무슨 의미겠냐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인생이 그런 거 아니겠는가. 아이가 보라는 거만 보지 않았고, 우리가 꼭 포토존에서 사진 찰칵 찍지 못했더라도, 우리가 함께 걸어온 길에는 분명 거대한 의미가 있을 테니까.
믈라카에서 이틀을 보내고 우리는 조호르바루까지 버스로 3시간 30분을 이동했다. 한 시간 간격으로 버스가 있어 어둡기 전 조호르바루의 숙소에 도착하자면 2시 반 버스를 타야 했는데, 그 시간쯤이 딱 낮잠시간인 하하는 오전 내내 뛰어다닌 탓에 터미널로 이동하는 길에 졸음을 견디지 못했다. 택시를 탈만한 거리가 아니었다. 45리터 배낭을 뒤로 메고 앞에 백팩을 하나 더 메고 아이까지 안고 걸으면, 단 5분을 걸어도 몸이 땅속에 박히는 느낌이 든다. 어쩔 수 없었다. 터미널에 어떻게든 시간에 맞춰 도착해야 한다.
믈라카에서 조호르바루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하하는 낮잠에서 깨어났다. 어리둥절해하는 것도 잠시, 창밖의 풍경에 이내 완전히 몰입했다. 창밖의 풍경이라는 것이 별것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나가는 자동차들. 도로에 자동차가 지나가는 것은 얼마나 당연한 광경이냐. 자동차 한 대가 버스를 앞질러 휙 지나갈 때마다 혀 짧은 소리로 "저기 차!"라는 말을 반복했다. 이 모습이 재밌었는지 급기야 뒷좌석의 여행객으로 보이는 노부부가 자동차가 휙 지나갈 때마다 웃으며 하하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쪄기차, 쪄기차!"
조호르바루에서 2박을 잡아두었고 둘째 날 아침 일찍부터 이동해서 레고랜드와 워터파크에서 종일 놀 생각이었다. 레고랜드에서 오전 내내 충분히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점심식사 후 워터파크로 이동했는데 급 졸려하는 하하. 하하의 체력은 또래들 중에서 최상에 속한다고 보는데, 그 가장 큰 비결은 잘 먹고 잘 자는 것이다. 잘 자고 잘 먹는 생체리듬을 만들어주기 위해 아이를 키우며 규칙을 매우 철저히 지켰다. 여행지에서의 철칙도 아이가 낮잠을 자야 하는 시간을 지킨다는 것이었다. 아이가 졸려하면 어떻게든 환경을 만들어 재웠다. 탈의실 벤치에 앉아 아이를 안고 한 시간을 있었다. 물놀이를 좋아하는 나는 하하가 깨어나면 애를 혼자 두고 움직이지 못할 테니, 자고 있을 때 잠깐 후딱 가서 슬라이드라도 타고 오고 싶었지만, 생각일 뿐이다. 이 사람 많은 곳에서 일분일초도 아이를 혼자 둘 수는 없는 일.
한 시간쯤 후 아이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자 이제 즐겨보자! 본격적으로 물놀이를 즐겨보려 나섰는데 비가 오기 시작. 이곳 워터파크는 비가 오면 운영을 종료한다. 이렇게 황당하고 황망한 일이. 우리는 거기까지 가서 풀에 몸 한 번을 담가보지 못하고 워터파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다시 워터파크를 가보자고 말레이시아 체류를 하루 더 연장하는 것은 전체 일정배분을 고려했을 때 좋은 선택 같지 않았다. 아쉽지만 우리는 예정대로 다음날 아침 육로로 싱가포르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