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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estas Dec 26. 2020

빠이에서 얻은 것

아이는 어른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본다

하하는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나의 첫 동거인이다. 어린아이와 단둘이 여행을 갈 때 엄마들이 가장 겁내는 게 무엇인지 나는 안다. 아이에게서 눈을 뗄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여행이 여행이 아니고 독박 육아라는 것. 나는 애초에 독박 육아였기 때문에 그게 걸리지 않았다. 나는 무엇을 하든 하하와 함께 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하하로 인해 원래의 나를 제한하는 것을 최소화하고, 언제든 하나가 아니라 둘일 수밖에 없는 조건을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마음먹는다고 늘 즐거울 수만은 없는 일. 인생사가 다 그럴진대, 하물며 육아가 그럴 리가.


미리 찾아본 정보들을 통해, 많은 배낭여행자들이 기대하는 빠이의 모습을 짐작했다. 빠이에서 여행자들이 모이는 중심 거리는 흡사 십수 년 전 처음 갔던 방콕의 카오산로드 같은 느낌이었다. 병맥주를 들고 흥얼거리며 혼자 걸어도 그저 거리의 일부일 그런 빠이도 좋았지만, 내가 하하와 찾고 싶은 곳은 돌과 흙과 벌레들을 품은 시골길이었다. 히피들의 천국이라 불리는 빠이와, 새소리 풀벌레 소리 가득한 시골 외갓집 같은 빠이가 스쿠터로 십 분 거리에 있는 곳이 바로 여기다.

그리고 가끔 침대로 기어오르는 개미와 에어컨 없는 선풍기 방이 괜찮다면 이만 원대에 수영장 딸린 멋진 오두막집에 묵을 수 있는 호사는 덤.

"엄마, 여기가 우리 집이에요?"

"검은 고양이가 있어요!"

하하는 방문을 열고 나가면 저 멀리 풀을 뜯는 소떼들이 보이는 그림 같은 들판과 수영장이 있는 이 숙소가 마음에 들었나 보다. 방에 들어와 막 짐을 풀고 간식을 주려고 준비하던 찰나, 침대 위에 올라가서 촐랑거리던 하하가 추락(?)했다. 27개월의 하하는 긴 문장은 말하지 못하고, 소변을 완전히 가리지 못하고, 아직 하루 한 번 낮잠을 자야 하는 월령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 의자든 침대든 높은 곳에 혼자 두고 시선을 떼는 것이 안심이 안 되는 아기였다. 내 바로 옆에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얼굴부터 떨어진 것 같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자지러지게 우는 아이는 입술이 다 터지고 입안에도 피범벅이었다. 붓기 시작하는 윗입술을 들춰보니 맙소사 상순소대가 끊어져 있다. 이 여행의 첫 번째 사고.


피를 보니 겁이 덜컥 났지만, 찾아보니 상순소대가 찢어지는 유아 사고는 블로그에 사례가 많았다. 지혈과 소독을 잘해주면 별다른 후유증은 없는 것 같다. 대부분 저절로 붙고 붙지 않아도 사는데 지장은 없다고 한다. 다행히 하하도 곧 울음을 멈추고 다시 즐거운 여행객으로 돌아와 주었다.


빠이에서부터 낮에는 하하의 기저귀를 채우지 않았다. 밤에는 숙소 이불에 실수하면 안 되니까 채울 수밖에 없었지만, 낮엔 자연과 어울리며 신경 쓸 게 없었다. 미처 타이밍을 놓치고 바지에 싸면 금방 빨아서 탁탁 털어 널어둠 그뿐. 그렇게 하하는 여행에서 돌아오고 일주일 뒤, 내 출근을 이틀 앞두고 밤낮 대소변을 완벽하게 가리게 된다.


빠이에서 우리가 한 일은 흙길을 뛰거나 걸은 것, 빌리지팜에 방문한 것, 고양이와 강아지와 어울린 것, 닭과 양 떼가 있는 마당이 넓은 식당에서 밥을 먹은 것. 그리고 더우면 수영장에서 들어갔다가 나오고, 평상에 앉아 들판을 바라본 것 정도. 이 여행을 통해 확실히 깨달았다, 아이들은 어른이 보지 못하는 많은 것들을 본다. 이 길을 천천히 자기식대로 걸은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가 성장하면서 조금도 다르지 않을 수가 있을까, 설사 기억을 못 한다고 해도.


아이와 함께하는 여행이라면 보통 리조트를 선택하지만 그건 아이의 선택이 아니라 어른 입장의 편의다. 여행에서 내가 하하에게 해준 것은 하하가 흙바닥에 앉아 개미의 이동을 보겠다고 할 때 옷이 더러워진다고 하지 않고 내버려 둔 것,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길에서 알 수 없는 것들에 집중하며 지체할 때 빨리 다음 장소로 가야 한다고 재촉하지 않고 아이의 시간을 기다려준 것, 그런 일들이었다. 돈은 전혀 들지 않았던 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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