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건국의 아버지, 리콴유
리콴유, 한자로는 李光耀라고 쓰며 '光耀' 빛나는 영광이라는 뜻의 이름처럼 그의 삶도 그러했다. 더 큰 의미를 부여하자면 싱가포르는 그의 이름과 그 운의 궤를 함께 했다.
내가 싱가포르에 와서 놀란 점은 이 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그들의 지도자였던 리콴유를 매우 좋게 평가한다는 것이었다. 내 딸의 친구 엄마들도, 어학원 선생님들도, 심지어 그랩 기사들까지도 말이다.
"그는 매우 뛰어난 예지력이 있는 지도자였으며, 그가 없었더라면 싱가포르도 없었을 것이다."
그가 이루어낸 싱가포르는 결과로 입증이 가능하다.
*1인당 GDP 500 달러 -> 9만 달러
* 전 국민의 86% 이상 자가 보유
* 세계 최상위권의 교육
:싱가포르국립대학교(NUS) 세계 랭킹 8위
난양공과대학교(NTU) 세계 랭킹 11위
* 2024년 IMD에서 발표한 세계 국가경쟁력 1위
이 모든 것을 이루어낸 리콴유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중국계 싱가포르인으로 싱가포르 최고의 명문학교인 래플스 컬리지에 수석합격하였고, 졸업시험에서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전체에서 차석을 하였다. 수석은 그의 부인인 콰걱추 여사였다고 한다. 영국 식민지 시절에서 자랐기에 그의 모국어는 당연히 영어였으며, 사고방식도 그러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싱가포르를 점령하면서 백인이 언제나 강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 시기는 싱가포르의 암흑기였지만 훗날 지도자가 된 그에게는 나름의 교훈을 주었다. 바로 일본의 ‘엄벌주의’였다. 강력한 법규로 처벌을 강화했던 일본의 지배에서 싱가포르는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렸지만 오히려 범죄율은 낮았다. 이러한 엄벌주의의 영향으로 싱가포르는 오늘날 세계에서 유일하게 범죄자에게 태형을 선고하고 있다. 어쨌든 일본의 패망 이후 리콴유는 영국 유학길에 올라 런던 정경대를 거쳐 케임브리지 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영국에서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한 리콴유는 싱가포르로 돌아와 노조, 학생운동과 관련된 소송을 맡게 되었고, 여러 소송 합의와 중재에서 뛰어난 성과를 내어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는 물론 영국 식민당국에서도 그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54년 10월, 인민행동당(현 집권 여당)을 창당하고 본격적인 정치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으며 5년 후 35세의 나이에 싱가포르 초대 총리로 취임했다.
그의 생애 초반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그는 친서방주의자, 실용주의자, 반공산주의자였다. 그리고 이는 싱가포르 국가 운영에 그대로 반영이 되었다. 초기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 연방에 속해있었으나, 1965년 말레이시아 총리로부터 축출 통보를 받고 원치 않는 독립을 하게 되었다. 그의 자서전에 따르면 이때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절망적인 순간이었다고 한다. 아무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은 싱가포르를 이끌어야 하는 그에게 당장 주어진 것은 ‘국가개발’이라는 엄청난 임무였다. 그는 모든 문제를 해결해 나가기 시작했다.
1. 군대양성
주변국의 침공을 대비하기 위해 실전 경험이 풍부한 이스라엘 장교단으로부터 군대를 육성하였으며, 단시간 내에 동남아시아 최강의 군사력을 정비하였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인종과 종교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군대 내에서 영어를 공용어로 정하였으며, 서로의 종교를 존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데 많은 노력을 하였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징병제이며, 다른 점이 있다면 싱가포르 영주권자도 군 복무가 의무라는 것이다.
2. 영어 공용어
그는 언어가 사회 통합의 핵심이라고 믿었다. 중국계, 말레이계, 인도계가 섞여있던 나라에서 다수의 언어가 아닌 ‘영어’라는 비주류 언어를 공용어로 지정하여 사회 갈등을 해결하고, 미래 세대는 영어가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언어가 될 것이라 믿었다. 물론 그들의 민족적인 뿌리의 정체성과 이중언어교육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학교에서 학생들은 모국어를 반드시 배워야 한다. 언어는 미래라는 그의 생각을 들여보니 매우 선각자가 아닐 수 없다.
3. 실용주의 교육 체제
‘똑똑한 천재 한 명이 나라 전체를 먹여 살린다’라는 말이 들어본 적이 있는가? 사실 이 말은 리콴유를 두고 한 말이 아닌가 싶다. 엘리트 위주의 선발로 초기 정부를 구성하였으며, 효율적인 교육을 통해 인재를 양성하는 것만이 싱가포르가 만들어낼 수 있는 유일한 자원이었다. 싱가포르 교육의 희비는 초등학교 6학년 때 갈리게 되는데, 중학교 진학을 위한 시험(PSLE)을 통해 각 레벨에 맞는 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그리고 중학교 졸업시험을 치르고 난 뒤 2년제 공립 고교과정인 junior college에 진학하게 된다. 그리고 이 학교에 진학한 학생들이 대부분 NUS나 NTU에 진학하거나 아이비리그나 옥스브리지에 자학금을 받고 공부를 이어나간다. 즉, 상위 15%만이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머지 학생들은 직업학교에 가서 사회로 나가기 위한 기술을 배운다.
4. 공무원 연봉 인상 -> 국가 발전과 청렴도에 큰 기여
리콴유는 나라가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공무원 조직에 유능한 인재들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공무원의 부정부패 원인이 저임금에 있다고 생각하여 월급을 80% 이상 인상하였다. 현재 싱가포르의 공무원 월급은 최소 1억 원이다. 공무원 고액 연봉에 대한 또 다른 이유는 그는 공무원들이 애국심으로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무원 조직 내에서 뛰어난 성과를 낸다면 파격적인 보상을 주었다. 또한 리콴유는 부정부패를 척결하기 부패조사전담기관인 CPIB(Corrupt Practices Investigation Bureau)를 설치하여 부패를 저지른 공무원에 대해서는 전 재산 몰수와 해고 후 관련분야 민간 재취업 불가라는 무관용의 원칙을 내세웠다. 이 것이 싱가포르의 유능하고 청렴한 공무원 조직을 이루어낸 배경이며, 그의 혜안대로 싱가포르는 일류국가로 전진하게 되었다.
5. 경제 발전
싱가포르는 1819년 영국 동인도 회사의 스탬포드 래플스(Stamford Raffles)에 의해 일찍이 그 지리적 이점을 활용한 자유무역항으로서 경제 발전을 이루기 시작했다. 관세면제로 인한 무역은 많은 상인들과 기업을 끌어들였고, 덕분의 외국의 자본과 기술을 싱가포르에 유치할 수 있었다. 이처럼 중개무역으로 성장한 싱가포르는 외국기업의 진출을 장려하기 위해 세금과 규제를 대폭 완화하는 정책을 펼쳤다. 여기에 투명한 정부운영이 외국기업의 신뢰를 샀고, 아시아 금융 허브로서 발돋움하게 되었다.
오늘날 싱가포르는 무역, 금융, 관광, IT 등 다양한 산업으로 경제 다각화를 이루었다.
6. 전 국민이 집을 보유할 수 있도록 만든 정책,
HDB(Housjng Development Board)
집권 초기에 리콴유는 국민들의 주거문제를 반드시 해결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있었다. 그리고 이 문제를 HDB 설립을 통해 해결하려 했다.
HDB에서 아파트를 건설하여 국민들에게 분양하는 정책으로 집값의 20%만 지불하면 입주가 가능하다. HDB 구매는 1인당 2회로 제한된다. 의무거주기간 5년을 채우면 재판매를 시세차익을 얻을 수 있고, 주택소유기간은 99년으로 이 기간이 지나면 정부에 반환한다. 사실상 국가가 실질적인 집주인이며, 싱가포르 토지의 90%가 정부 소유다. 그렇기에 집값 안정화에 정부가 직접적으로 개입하여 주택을 이용한 투기를 막는다.
다만 이 HDB의 혜택은 오로지 싱가포르 국적을 가진 이들에게만 해당된다. 물론 고소득자의 싱가포르인들은 예외이다. 외국인들은 콘도나 랜디드하우스와 같은 고급 주택에서 매우 비싼 값에 렌트를 한다. 정부는 공공 부문과 달리 민간 부문의 주택 분양가에는 개입을 하지 않기 때문에 콘도와 HDB의 렌트비 차이가 클 수밖에 없다.
보호받고 방어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인 집이라는 개인재산에 대한 인간의 욕심을 리콴유는 정확히 읽어냈고, 그가 만든 국민 복지정책인 HDB는 그의 장기집권을 이끌었다.
안정적인 사회통합을 이루기 위한 완벽한 방법이 있을까? 싱가포르 정부는 다양성의 공존을 위한 사회통합이라는 명분하에 언론을 규제한다. 또한 유해한 콘텐츠는 정부가 직접 나서서 삭제하며, 2109년 가짜뉴스법 도입으로 허위 정보 유포를 차단한다. 뿐만 아니라 싱가포르 초기 정부부터 인민행동당이 정치 헤게모니로 장악해 왔다.
이러한 부분들이 세계적 시각에서는 민주주의 발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이러한 강한 규제와 일당우위 체제는 사회안정을 이끌어냈고, 대다수의 싱가포르인들은 정부의 이러한 규제에 큰 불만이 없다.
리콴유는 독재자일까? 만약 그렇다면 그는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독재자이자,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끼친 지도자일 것이다.
다음은 리콴유의 여러 명언 중 한 구절이다.
"I have no regrets. I have spent my life,
so much of it, building up this country. There's nothing more than I need to do.
At the end of the day, what have I got?
A successful Singapore.
What have I given up?
My li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