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래스카 여행기
대합실에 앉아 언니 친구가 가져온 빵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번잡스러운 상념, 긴장, 후회, 두려움의 끈이 한순간에 끊어져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렇게 한동안 앉아 있었다. 아이들은 쭈그리고 앉아 스마트폰에 정신을 집중했다.
주위가 고요해지면서 한국이 그리워졌다. 와이파이가 잡혔다. 내가 활동하는 카페로 들어가 미국 와서 처음으로 내 소식을 전했다. 잠시 후, 인터넷이 불통되어 버렸다. 아이들은 와이파이 존을 찾아 돌아다니고 난, 속으로 꿍꿍 가슴앓이를 했다.
‘시간을 되돌렸으면 좋겠다.’
‘동생이 미국 가고 싶다고 할 때, 가만히 있을걸......'
탑승 시간이 되어 해당 게이트로 갔다. 날씨 때문에 비행기가 연착된다고 안내방송이 나왔다. ‘연착하려면 아까 그 비행기나 연착할 것이지.’
탑승하고, 4시간 정도의 비행 후에 캐나다 밴쿠버 공항에 도착했다. 밴쿠버의 공기는 따뜻했다. 온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느낌이 그렇다는 것이다. 공항의 직원들과, 시설, 전체적인 디자인, 뭐 이런 것들이 매우 인간적이며 포근하게 다가왔다.
터미널 안쪽으로 들어오자 한쪽 벽이 온통 캐나다 로키산맥의 대형 사진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한쪽엔 여행안내 팸플릿이 골고루 구비되어 있었다. 밴쿠버 다운타운 지도를 하나 빼어 들었다. 짐 가방을 찾아 끌고, 하룻밤 그럭저럭 지낼 만한 곳을 찾아야 했다. 대합실의 벤치형 의자에 외국인 서 너 명이 온통 몸을 쪼그리고, 보기에도 어설퍼 보이는 재킷을 덮고, 또는 그냥, 반팔 소매의 옷을 입은 상태로 자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며 대합실은 에어컨의 가동으로 추워졌다. 짐 가방에서 가장 따뜻한 옷을 꺼내 입고 양말도 신고, 샌들을 운동화로 갈아 신었다.
카톡을 열어보았다. 카페의 반가운 얼굴들이 응원 글을 남겼다. 고마웠다. 기운이 났다. 지금의 상황이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대합실 의자에 누워 한 동안 핸드폰에 열을 올리던 아이들도 잠이 들었다.
처음엔 편안한 상태로 자던 아이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몸을 새우처럼 웅크리기 시작했다. 가방 속에 있는 몇 개 되지 않은 옷을 있는 대로 꺼내어 덮어주었다.
난 잠이 오지 않았다. 추워서 잘 수가 없었다. 수시로 화장실에 가서 따뜻한 물로 손을 씻었다. 대합실을 어정어정 걷다 누웠다를 반복했다. 혹시 대합실 밖은 따뜻할까 싶어 나가 봤지만 쌀쌀한 데다가 바람까지 불었다. 길고 긴 고통의 밤이었다.
날이 밝으니, 주위에서 자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길을 떠나는 새로운 사람들이 공항 대합실로 몰려들었다. 다리는 퉁퉁 부어 뻣뻣했고, 눈은 부석 거리고, 피부는 처지고, 머리는 완전 노숙자 스타일로 뒤 엉켰다. 삐죽거리는 머리는 꾹꾹 누르고, 눌려진 부분은 손가락을 넣어 세웠다. 추위로 하나하나 빼 입었던 옷들을 가방에 구겨 넣고, 공항을 빠져나왔다.
공항을 벗어나자 곧 지하철이 나왔다.
난 아이들이 지나치게 기대했다가 크루즈 배를 보고 실망할까 봐 선수를 치기 시작했다.
“배는 그렇게 크지 않대.”
“헐.”
“뷔페가 있는데 매일 시리얼 같은 것만 준대.”
“시리얼 같은 것만 주면 그게 왜 뷔페예요?”
“그러게 말이다. 맛있는 것을 먹으려면 돈을 내야 한대. 그런데 나는 돈을 더 내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마음이 없어.”
“아, 망했다. 그럼 왜, 크루즈 왔어요?”
“ 빙하 보러. 빙하가 멋있대.”라고 말하며 아이들을 우울하게 만들어 놓았다. 그렇게 말해 놓고 보니 내심 내가 불안해졌다.
지하철 표를 사기 위해, 미국 달러를 캐나다 달러로 바꾸어야 하고, 승차권을 산 다음, 지하철을 잘 찾아 타고, 실수 없이 잘 내려서, 다운타운으로 가야 된다고 머릿속에 하나하나 정리를 했다. 이제 밴쿠버에 왔으니 승선 전까지 알차게 시간을 보내야 됐다.
가는 길에 보니 자동 발권기의 동전 투입구 위에 ‘Free Transit Day’라고 쓰여 있었다.
‘고모, 공짜예요’. 조카가 신나서 말했다. 나도 덩달아 신났다.
지하철은 사람들로 붐볐다, 12개의 정거장을 거처 우리의 목적지인 워터 프런트 역에 도착했다. 역을 벗어나자, 아름다운 날씨와, 부드러운 공기, 깨끗한 도시에 우리는 환호성을 날렸다. ‘좋다. 좋아, 너무 좋다.’
좋았다. 그토록 머릿속을 복잡하게 했던, 알래스카 크루즈가 곧 실현될 것이기에 너무 좋았다. 멀리서 정박하고 있는 우리의 크루즈, ‘노르 웨지 언 썬’ 호가 보였다. 오기 전에는 이곳 사정을 알지 못해, 여기까지 오는 것에 대단한 각오를 해야 했지만, 막상 와 보니, 밴쿠버 공항에서 지하철만 한번 타면 아주 쉽게 올 수 있는 곳이었다. 스텐리 공원도 가 볼 계획이었으나, 크루즈 배가 눈 앞에 보이고, 비행기를 놓쳤던 전적이 있어서 우린 빨리 도착해서 수속하는 것이 좋겠다고 결론을 내고 배를 향해 갔다.
알래스카 크루즈 배가 입항하는 ‘캐나다 플레이스’의 건물 지붕이 하얀 돛 모양으로 되어 있어 독특하면서도 아름다웠다. 건물의 양 쪽으로 캐나다의 역사나 전설을 알리는 각종 홍보물이 세워져 있었고, 빨간 단풍잎의 캐나다 국기가 빛나고 있었다. 크루즈를 타러 온 많은 관광객으로 북적였고 그들의 얼굴은 생기 발랄했다.
승선 수속하는 곳을 찾아가니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우리 앞에 펼쳐진 엄청나게 큰 크루즈 배를 보고 아이들은 기뻐하였다. 그곳에서 캐나다 출국 수속과 미국 입국 수속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인터넷상으로 '노르 웨지 언 썬‘을 보았지만 크기나 시설이 감이 잡히지 않아서 내심 걱정도 했었다.
이제 통과해야 할 하나의 관문이 남았다. 한 블로그에서 본 것인데, 자기 자녀가 아닌 18세 미만의 아이와 같이 타려면 부모 동의서를 가져와야 한다는 것이다. 조카를 데리고 있던 나는 위조문서를 하나 만들었고, 그것으로 잘 넘어갈 수 있을지. 아니면, 또 한 번 골머리를 썩어야 할지 신경이 쓰였다.
그러나 누구도 부모 동의서 내놓으란 말을 하지 않았다. 왜, 그런 소리를 써놔서 내 속을 태우게 하는지. 나는 미리 인터넷 상으로 체크인을 한 상태라 수속이 쉽게 끝났다.
방키와, 쇼핑 안내서, 그리고 오늘의 일정표를 받고 배에 오르자, 갑판에서 크루즈 직원들이 알록달록한 풍선으로 한 껏 분위기를 띄워 놓고, 파티 복장을 하고 흥겨운 노래에 맞춰 춤을 추며 크루즈 가족들을 맞이하였다. 밝고 정다운 표정이었다.
우리 방은 9층에 있었다. 9층 314호. 방이 어떨까 몹시 궁금했다. 우리 방은 창문이 없는 가장 싼 방인지라, 내심 불안한 감이 있었다. 방지를 넣는데, 두근두근했다. 우리의 운명이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했다. 드디어 문이 열렸다. 우리는 환호성을 질렀다. 와, 방 좋다. 새하얀 시트로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침대, 응접세트, TV, 뜨거운 물이 콸콸 나오는 넉넉한 공간의 샤워실, 기대가 적으면 만족이 큰지라, 우린, 2인용 침대 하나와, 벽에 보조로 붙어있는 침대가 그렇게 마음에 들 수가 없었다.
샤워를 하고는 곧바로, 뷔페에 갔다. 연어 요리, 비프스테이크, 소갈비, 치킨, 수박, 파인애플, 멜론 등 여러 종류의 과일들, 바케트 빵, 크로와상, 온갖 종류의 케이크들.... 먹을 것이 너무 많아 고민이었다.
서빙하는 직원들이 무척 친절하고 포근해 보였다. 바다를 보며 풍성하게 준비된 뷔페를 먹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잠시 누워 있었다. 배가 움직이기 시작한다고 느끼면서 잠이 들었다. 눈을 떠 보니 저녁 시간, 그래서 또 뷔페로 갔다.
이제 신경 쓸 거 하나도 없다. 모든 고민의 끝이다. 내일 뭘 먹을지, 어디를 갈지, 어디서 잘지. 고민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