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래스카 여행기
우리가 승선한 노르 웨지언썬 호는 매일 저녁에 다음날의 일정표를 배달해 주었다.
일정표에는 날씨, 해 뜨는 시간, 지는 시간, 오락, 놓치면 아까운 중요한 프로그램들, 알래스카 안내 프레젠테이션, 빙고게임, 선택관광에 대한 안내 및 상담, 다큐멘터리 상영, 함께 노래 부르기, 다 같이 춤추기, 기항지 안내, 식사, 승무원들과 대화시간 등이 매우 체계적으로 안내가 되어있어서 인상적이었다.
옥상에서는 푸르르고 눈이 부신 태양 아래, 젊고 예쁜 아가씨들이 수영을 하며 명랑하고 건강한 웃음을 뿜어 냈다. 또 일부는 수영장 긴 의자에 길게 누워 독서하며 선탠을 하고 있었다. 그 앞 공연 무대에서는 댄스 배틀이 벌어지고 있었다. 신나는 소리에 우리도 구경을 했는데 웬 꼬마가 나와서 ‘강남 스타일’ 음악에 맞추어 말춤을 추었다. 난 너무나 반가워 휘파람을 불며 열심히 박수를 쳐 주었다.
이곳에서 그 전설의 노래를 들으니 뿌듯하고 새삼스레 싸이가 고마워졌다. 이 강남 스타일은 그 이후에 또 한 번 듣는 기회가 있었다. 크루즈가 기항지에 정박하면 관광객들이 아침에 나갔다 오후에 들어오는데 귀선에 때 맞춰 크루즈 직원들이 춤을 추며 환영해준다. 그때 이 노래가 나왔다. 난 그들이 말춤까지도 췄으면 좋겠다 생각했는데 일부는 추지만 전체적으로 추지는 않아서 약간 서운하기도 했다. 만약, 내가 ‘강남스타일’이 한참 뜰 때 크루즈를 했다면 그 신나는 떼춤에 동참했을 텐데 하고 약간 아쉬운 감이 들었다.
매일 밤에 극장에서는 쇼가 공연된다. 승객의 절대다수가 노 부부이어서인지 모르겠으나 그분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노래와 춤에 초점을 맞춘 공연도 여러 번 있었다. 그들은 그 시대를 함께 한 앨비스 프레슬리, 비틀스, 폴 앵카와 같은류의 노래에 공감하며 열광했다. 그 노래들은 당시 나도 미지의 세계, 꿈의 세계인 미국을 동경하며 불렀던 노래들이어서 감회가 새로웠다.
쇼의 사회를 맡은 리처드 매틱 씨는 필리핀계로 발음이 매우 정확하고 쾌활하고 세련된 무대 메너로 우리나라 유재석 정도로 사회를 잘 보았다. 그는 매 쇼가 시작되기 전에 극장 앞에 서서 승객들을 맞고 순식간에 무대에서 빛을 발하고 나갈 때 보면 극장 밖에서 일일이 관람객을 환송하며 대화를 했다. 나이트 아웃 시간에도 깜짝 등장하여 날렵하고 멋진 모습으로 댄스를 선 보이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함께 어울릴 수 있도록 격려하며 분위기를 띄웠다.
며칠 전 딸이 틀어놓은 음악 중에 귀에 익은 음악이 하나 들려왔다. 이 음악을 어디에서 들었더라? 곧 생각이 났다. 매틱이 나이트에서 이 음악에 맞추어 동료와 함께 춤출 때 나왔던 '로빈 시케'의 ‘blurred lines’라는 곡이었다. 그 음악을 들으니 그가 그 음악의 리듬에 맞추어 빙글빙글 돌면서 춤을 추던 모습이 눈에 그려져 잠시 그때를 추억했다.
크루즈에서는 댄스의 기회도 충분히 제공했다. 매일 오전과 오후 각각 1회씩 차차 댄스나 왈츠, 볼리우드 댄스, 라인댄스, 룸바, 탱고 등 dance 교실이 운영되었고 밤 10시 반이 넘으면 ‘나이트 아웃’ 시간이 되어 사람들은 밤새도록(몇 시까지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춤을 추웠다.
나도 그들과 어울리고자 얼굴색이 다양한 그들과 함께 댄스를 배웠다. 서로 모르는 사람끼리 웃으며 땀 흘리며 함께 댄스를 배우면서 그들도 우리랑 다르지 않다는 동질감을 갖게 되었다.
나이에 상관없이 함께 할 수 있어서 좋았다. 청년들도 있고 노 부부도 있다. 84세의 할아버지가 댄스대회에 참여한 것은 나에게는 큰 도전정신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열심히 산다면 나이가 많다고 절대 주눅 들 필요가 없다고 나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 할아버지는 댄스대회에서 우승을 하였고 많은 이들로부터 격려의 박수를 받았다. 그 이후에도 그분은 나이트 시간에는 어김없이 나타나 만면에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부인과 함께 신나게 춤을 추셨다.
크루즈에서 음악은 댄스와 함께 빠질 수 없는 메뉴다. 이번 크루즈에서 의미 있었던 것은 잊고 있었던 음악에 다시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낮에는 낮대로 밤에는 밤대로 바쁜 일상 속에 파묻혀 살다 보니 나 자신을 성찰한다던지 독서, 음악, 미술, 공연 같은 지적 사치들을 못 누렸을 뿐만 아니라 내가 그렇게 결핍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크루즈에서는 음악을 들을 공간이 꽤 여러 군데 있었다. 약간의 돈만 투자한다면, 연주자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대화를 하며 음악을 감상할 수 있었다.
어느 날 난 한 음악카페를 지나가는 중이었고 피아노 소리를 듣고 발을 멈췄다. 피아노 연주자가 ‘오페라의 유령’ 주제곡을 메들리로 연주하고 있었다. music of the night, the phantom of the opera, think of me... 팬텀이 크리스틴을 유혹할 때의 몽환적인 모습, 크리스틴이 처음 주인공으로 발탁되어 떨리는 가슴으로 관객 앞에서 노래 부르던 모습, 팬텀이 크리스틴을 지하세계로 인도하는 모습들이 눈앞에 그려졌다.
난 3년 전에 이 공연을 라스베이거스에서 보았는데 너무나 감동을 받아 집에 오자마자 영화를 다운로드하여 수도 없이 보았었다. 거의 신물이 날 만큼 보았다. 다시 들으면 질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냥 지나갈 수가 없었다. 난 알코올을 주문했다. 별로 아는 술도 없고, 만만한 것이 맥주라서 맥주를 주문하고 한 두 모금 마셨다. 내 앞으로 분위기 있어 보이는 동양계의 긴 머리 여인이 들어와 앉았다. 다리를 꼬고 홀로 앉아 있는 그녀의 뒷모습이 무척 아름다웠다.
왜. ‘진작 이곳에 오지 않았을까.’ 다음날, 그리고 그다음 날도 난 그곳에 들렀고, 맥주를 시켜 한 두 모금 마시고 연주자에게 다가가 부탁했다 ‘저 팬텀 곡 한 곡만 들려주시겠어요? 저 여기에 팬텀 때문에 오거든요,’
어느 날 조카가 운동하고 돌아오면서 아트리움에서 에서 파티가 벌어진다고 하였다. 승무원들과 관광객들이 함께 모여 즐겁게 노래 부르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참여하려던 것이었는데 깜빡했던 것이다.
나가 보니, 아트리움의 s자형 계단에 선장을 비롯한 주요 승무원들이 빼곡히 서 있었고, 예의 그 매틱은 유려한 말솜씨로 관광객들과 호흡하며, ‘크루즈 가족과 함께 노래 부르기’ 이벤트를 멋지게 진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매틱이 이 크루즈의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거의 끝 부분에 참석하여, 'Take me home, Country road'와 ‘Sweet Caroline'만 부를 수 있었다. 매틱의 행사 종료의 말이 끝나자, 높은 천장에서는 알록달록 예쁜 풍선들이 하늘거리고 떨어져 내려와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서로 풍선을 쳐서 날려 올리는 놀이가 계속 이어졌다. 비틀스의 'Hey Jude'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