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평범성

단편 - 8

by ForestOfApocrypha

그날 저녁도 여느 때와 다름없는, 피곤함과 나른함이 공존하던 때였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특가로 산 패브릭 소파에 몸을 아무렇게나 뉘어놓고는 영혼 없는 눈동자로 TV 화면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TV도 재고떨이를 하는 걸 가져온 거다 보니 아내에게 짠돌이라고 잔소리를 들었던 것이 기억난다. 괜스레 생각이 많아지는 것 같아 온몸의 기운을 끌어내 고개를 털고는, 바닥에 놓여 있던 리모컨을 슬면서 집어 들었다. 내 삶과는 거리가 먼 여행 예능 채널을 슥슥 넘기다가, 교양 있는 척해볼까 싶어 오랜만에 뉴스 채널을 틀었다. 무미건조한 표정의 아나운서가 교통사고 현장을 설명하고 있었다. 또 음주운전 때문에 그렇겠지, 하며 넋 놓고 보다가 얼마 안 가 TV를 꺼버렸다. 너무 자주 나오는 교통사고 특보들은 여행 예능 채널만큼 내 관심을 끌지 못했다. 나는 리모컨을 바닥에 살포시 내려놓고는, 품 속 어딘가에 박혀있던 핸드폰을 꺼내 쇼츠를 돌려 보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도파민이 돌며 정신이 맑아지는가 싶으면서도, 금세 질려버려 폰을 대충 소파에 집어던지고는 어느샌가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나는 부스스 소파에서 일어나 핸드폰을 켜보았다. 새벽 2시 36분. 아내가 분명 왔을 텐데, 나를 안 깨우고 그냥 간 모양이었다. 젠장, 소파에서 자는 내가 그렇게 지겨웠나? 나는 거실을 쓱 둘러보고는, 침실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집 안은 너무나 고요했다. 바닥의 얇은 마룻바닥이 내 발걸음에 맞춰 약하게 울리며 공허한 공간을 가득 메웠다.


침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무슨, 이 시간에도 집에 안 올리가 없는 걸 잘 아는 나는 바로 핸드폰을 켜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기나긴 신호음이 이어지고, 마음속에서 이상한 응어리 같은 게 맴돌던 찰나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낯선 남성의 목소리였다.


"저기 잠깐만요. 전화가 와서... 여보세요?"

"여보세요? 누구시죠?"


나는 바로 반문했다. 도대체 이 사람은 누구며, 왜 내 아내의 전화를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의 남성이 받는가. 궁금증과 묘한 불안감이 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혹시 J 씨 보호자 분 되시나요?"

"... 제가 J 남편인데요."

"..."

"여보세요?"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내 머리의 이성과 가슴의 감성이 격렬히 충돌하기 시작함을 느꼈다.


"지금 바로 W 병원으로 와주셔야겠습니다."




새벽 3시 30분, W 병원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보이던 것은 주차장에 즐비한 방송국 취재 차량과, 어지러이 주차된 형형색색의 차들이었다. 내 몰골을 보곤 취재진 몇 명이 나에게 다가왔지만, 이내 팀장급으로 보이는 사람의 손짓과 함께 물러났다. 그들과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장벽이 생긴 기분이었다. 그 장벽은 그들이 쳐준 건지, 내 무의식이 쳐준 건지 알 수 없었다. 저 멀리 기자들의 말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오늘 벌어진 사고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다쳐 여기 W 병원으로 긴급 후송되었습니다. 도로교통공사는..."

"연쇄 충돌 사고의 여파는 생각보다도 컸습니다. 도로가 통제되었지만, 후속 조치가 늦어..."


나는 점점 무거워지는 몸과 마음을 이끌고 병원 안으로 들어섰다. 병원 입구와 로비는 흰색 타일과 밝은 우드톤으로 꾸며져 있어, 누가 봐도 화사한 느낌을 받게끔 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내게 그 풍경은 그저 매끈하고도 차가운 얼음 덩어리처럼 느껴졌다. 병원 로비 안쪽으로 들어서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간호사 한 명이 나에게 물었다.


"오늘 사고 피해자 보호자분 이신가요?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 K입니다. J 남편이고요."

"아 K... K가... 3층으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간호사는 빼곡한 환자 명단 종이를 빠르게 훑고는, 나에게 지시를 내렸다. 나는 순한 양처럼, 그 지시를 망설임 없이 따랐다.




3층에는 별 다른 시설이 없었다. 단 하나의 시설만을 위한 공간이었는데, 그것은 바로 수술실이었다. 듬성듬성 놓여 있는 벤치는 어색할 정도로 깨끗했다. 한동안 사용한 적이 없는 것처럼, 아니면 너무 자주 사용해서 항상 청소를 깨끗이 한 것처럼. 수술실 입구는 굳게 닫혀 있었고, 불투명 유리로 되어 있어 안을 볼 수 없었다. 입구 위의 '수술 중' 등이 흰색 타일 바닥에 비쳐 내 온몸에 쏟아졌다. 수술실 앞에는 간호사 한 명이 대기하고 있었는데, 나를 보자마자 천천히 나를 향해 걸어오곤, 말을 걸었다.


"J 씨 보호자분 되시나요?"

"네... 제가 J 남편입니다."


간호사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나에게 말했다.


"지금 교통사고를 당하셔서, 긴급 수술에 들어갔어요..."


말 끝을 흐리는 간호사의 말을 뒤로, 나는 천천히 뒷걸음질 치며 가까운 벤치에 몸을 아무렇게나 내려놓았다. 간호사의 말은 내 머릿속을 새하얀 설원으로 바꾸었다. 나는 그 설원에 외로이 혼자 서 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나를 찾으러 와 주지 않았다. 추위에 떨고, 공포에 몸부림치고, 고통에 비명 질러도 그 설원에는 나 혼자 뿐이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설원의 녹은 눈이 내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나는 직감했다. 이 설원 속에서 영원히 살아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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