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1시 전화벨소리가 시댁의 집을 흔들 정도로 울려댄다. 경험상 새벽에 오는 전화치고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올 리가 없다.
전화를 받기 전 가슴부터 쿵쾅쿵쾅 떨리기 시작한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 부부가 설 명절이라 시댁에 내려온 사이 남편의 차를 몰고 나간 남동생이 운전 미숙으로 커브길을 제대로 돌지 못하고 굴러 떨어졌다고 한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교회 후배들을 가득 태우고 가다가 사고를 냈다고 연락이 왔다.
추운 계절에 드라이브 간다고 나간 남동생.
운전을 자주 하지도 않았었는데 무슨 용기에 차를 끌고 나갔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누구도 다친 사람은 없다는 것이었다. 천운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며칠 뒤 그중 한 명이 뺑소니 사고라고 동생을 신고했다. 분명 병원에 가서 진찰 다 받고 이상이 없다고 해서 귀가를 시켰다고 했는데 다친 곳도 없는데 교통사고로 입원을 했고 합의를 봐야 한다고 전해왔다.
그 당시 동생은 잘 나가는 보습학원을 운영하며 교회 청년부 지도를 하며 멋지고 활발하게 활동해오고 있었다. 아마도 돈이 꽤나 많이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그 후배의 부모님들은 합의를 보려면 3000만 원을 달라고 했다.
동생은 합의 보지 않겠다고 완강히 거부했고 결국 구치소에 입건이 되었다.
그 모든 뒤처리는 나와 내 남편의 차지가 되었다. 교회에 같이 다니는 청년부 중 한 명이 그런 일을 당하니 교회에서도 우리 부부와 함께 다니며 일 처리를 도와주셨다.
내가 하지 않아도 되는 일까지 이렇게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되니 나는 그때 십 년은 늙은 것 같았다. 그때 옆에서 묵묵히 일처리를 해주는 남편의 든든함이 나의 정신을 단단하게 해 주어 너무나 감사했다.
결국 교도소로 넘어가기 전 1000만 원으로 합의를 보고 손 묶인 채 버스에 오르는 동생을 가까스로 구치소에서 나오게 하고 그 일은 일단락이 되었다.
그 이후로 동생은 운전을 전혀 하지 못하게 되었다. 같이 웃고 떠들고 함께 했던 교회 청년부에서 그런 일이 생기다 보니 그 이후 교회도 가지 않게 되며 조금씩 고립된 생활을 하게 된 것 같다.
그 사이 나도 학원과 어린이집세 곳을 운영해야 했고 어린 나의 세 딸을 돌봐야만 했다.
동생네 학원까지 신경 쓰다 보니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많이 피폐해졌던 것 같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어릴 적 부모님 덕분에 유복하게 자란 우리 남매들은 어렵고 힘든 일을 성인이 되어서도 겪어 본 적이 없었다.
부모님 덕분에 편안하게 대학 다니고 졸업하고 내가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먹고 싶은 것 실컷 먹고 여행하고 싶은 곳 규제 없이 하고픈 거 다 하면서 살아왔던 우리 남매들은 그러한 것들이 귀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이 모두 다 그렇게 생활하는 줄만 알았다.
부모님의 능력 덕분에 누리는 그 많은 혜택들을 귀하다 여기지 않아 그 이후 쓰디쓴 경험을
하라고 자연이 내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를 더 귀하게 쓰시려고.
그 이후 동생은 학원일에만 집중을 하게 되었고 그 외에 사회생활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때 그 일이 어마어마한 충격으로 다가왔나 보다. 그 이후 학원과 집 밖에 모르던 동생은 스트레스와 칩거생활에 들어갔다.
보습학원 특성상 늦은 저녁을 먹어야 했고 워낙 좋아했던 육식과 걸진 음식들로 살이 급격히 쪄서 급기야 100kg까지 나가게 되었다.
몇 년을 그런 몸무게로 유지하더니 도저히 안 되겠는지 강남에 있는 재즈댄스학원을 다니면서 몸매도 멋진 성인 남성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그 친구를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본다.
그 이후 학원 중등부 애들에게 수업이 없는 날 재즈댄스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SM청소년재즈댄스 동아리를 만들어 멋지게 활동도 하게 됐다. 내 동생이었다. 우리 모두 그의 행보에 열광했고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줬다.
멋진 모습으로 재즈댄스공연하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하지만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게 된 그 당시 조금씩 조금씩 변해가는 그의 상황을 우리도 동생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너무나 유쾌했고 재미난 농담도 잘했던 동생은 학원과 집에서 점차 화를 많이 내기 시작했고 자기 성질을 컨트롤하지 못했다. 그저 모두 바쁘게 생활하다 보니 “쟤가 왜 저래, 다시 보지 말자”라는 식이 돼버렸다.
그때 조금이라도 의심하고 애정을 갖고 병원에 데려가서 뇌 쪽을 찍어보고 문제 발견을 했었더라면 좋았을 걸. 아니 지금처럼 자연건강법, 자연치유법을 알아 단식이라도 시켰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창창한 나이 39세에 뇌경색으로 쓰러져 55세가 된 지금까지 휠체어를 타고 다니지 않았을 텐데… 그때로 돌아가 원래 씩씩했던 동생의 모습으로 돌려놓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모든 게 후회막급이다.
그 당시 새벽 2~3시까지 학원에서 수업하고 가까이 있던 집을 놔두고 본인 스스로 구입한 수원 오피스텔에서 살고 싶다 해서 후배랑 함께
결국 혼자 있다 쓰러졌다. 쓰러졌을 당시만 해도 반드시 돌아올 줄 알았다. 건강했을 때로 돌려놓으려고 가족들이 부단히 노력했다. 평택에서 수원까지 출퇴근하던 때라 당시 급격한 스트레스를 받아 힘겨워하던 때가 생각나 마음이 무척 착잡하다.
함께 보습학원에서 초등부를 담당했던 여동생은 오빠를 살려 보겠다고 거의 날마다 평택에서 서울까지 가서 중환자실에 있는 오빠를 잠깐이라도 보고 와 바로 학원으로 와 일을 했다. 하지만 100평이 넘는 학원에 영어를 가르쳤던 남동생의 빈자리가 너무 컸고 학원 운영하기에 힘든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이 일은 여동생 또한 수렁 속으로 빠지게 되게 만들었다.
나와 여동생 둘은 어떻게든 동생을 살려내려고 노력했다. 그때 만났던 것이 죽었던 뇌세포도 살려 낸다는 ○○아미노산이었다. 수천 만원어치를 사서 먹였다. 살아서 제대로 사람 구실하고 걸어 다니기를 희망하며 작은 끈이라도 놓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를 썼다. 그리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죽지 않고 우리 곁에서 생활하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감사하긴 하다.
뇌경색 오기 전에도 학원 청소하고 집청소하며 집 꾸미기를 좋아했던 남동생은 누나한테 고맙다고 우리 학원과 집 청소를 해주고 있다. 그렇게 멋졌던 동생은 지금이 더 행복하다며 휠체어를 타고 가고 싶은 곳 가고, 배우고 싶은 것 즐기며 살아가고 있다.
여행을 좋아했던 나의 동생, 더욱 멋진 삶을 살기에 충분했던 내 동생 지금도 볼 때마다 마음 한편이 아려오지만 휠체어라도 타고 여행 다니는 멋지고 당당한 모습 펼쳐 나갈 수 있기에 감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