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_9934
내 곁에는 평생을 자식과 손주의 안부만 걱정하며 살아온 여든 넘은 할머니가 있다.
50이 넘은 아들이 밥벌이는 잘하고 있는지, 손자가 대학에서 성적이 우수한지, 손녀가 공부에 집중하는지, 군대 간 손자는 건강한지… 그녀의 마음은 단 하루도 쉴 틈이 없다. 흥미로운 건, 그렇게 늘 ‘걱정’으로 사는 그분에게서 우울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나는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우울의 해독제는 때로, 내가 걱정할 대상이 있다는 것이다. 우울은 대체로 ‘나 혼자’라는 감각에서 피어오른다. 세상과 단절되고, 사람과 단절되고, 자연과도 끊어진 순간 찾아온다. 반대로 누군가의 삶을 진심으로 신경 쓸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나 자신을 벗어난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 중에도 적지 않은 이들이 우울증을 겪고 있다. 약을 복용하다 효과가 없으면 자해라는 극단적 선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때마다 떠오른다. 혹시 이들에게도 ‘걱정할 대상’이 있었다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나의 할머니처럼, 매일 다른 사람의 삶에 마음을 쓰고, 작은 기도와 염려를 건네는 그 행위 속에 우울은 끼어들 틈을 잃지 않았을까?
고전은 말한다. “사람은 타인을 돌볼 때 가장 자기답다.”
철학자는 이런 현상을 사회적 관점에서 설명할 것이다. 인간은 원래 ‘연결된 존재’이기에, 혼자가 되는 순간 정신은 균열을 일으킨다고. 현명한 교육자는 부모가 자식을 향해 보내는 그 무한한 염려를, 세대를 잇는 지혜라고 부를 것이다.
그러니 혹시 오늘, 우울의 그림자가 스며드는 것을 느낀다면 이렇게 시도해보자.
누군가를 걱정해주는 것. 그것은 단순한 부담이 아니라, 우리가 다시 세상과 이어지는 가장 원초적이고 아름다운 방식이다.
어쩌면 우울은, 나 자신에게 몰두할 때 더 커진다. 반대로 누군가에게 마음을 내어줄 때, 우리는 기적처럼 치유된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깨닫게 된다.
“걱정은 짐이 아니라, 나를 살리는 숨결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