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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HAVE or TO BE

9816_ ‘가지려는 인간’에서 ‘존재하는 인간’으로

by 인또삐

요즘 나는 에리히 프롬의 세계에 빠져 있다.

책장을 덮어도 문장이 머릿속에서 맴돈다.

“너는 갖고 싶은가, 존재하고 싶은가?”

이 문장이 내게 물었다.
나는 잠시 멈칫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도 ‘갖고 싶은 인간’에 가깝다.


며칠 전, 회의 자리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누가 내 의견에 반대하자, 나는 바로 논리 모드를 켰다.
“그건 좀 다르게 봐야죠.”
입에서는 단정적인 어조가 흘러나왔다.

회의는 끝났지만 마음은 찝찝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 프롬의 말이 떠올랐다.

“갖는 인간은 말할 때 이기려 하고,
존재하는 인간은 들을 때 배우려 한다.”

그 말이 마치 내 뒤통수를 살짝 쳤다.
그때 깨달았다.
나는 대화가 아니라 ‘전투’를 하고 있었다.


요즘 세상은 점점 ‘갖는 인간’을 부추긴다.
더 많이 사고, 더 많이 보여주고, 더 크게 말하라고 한다.
심지어 대화조차 소유의 연장선이다.
“누가 더 똑똑한가, 누가 더 아는가.”
서로를 이해하기보다, 서로를 ‘이기려’ 한다.

SNS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좋아요와 팔로워 수를 ‘소유의 증거’로 쌓아간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자신이 무엇을 느끼는지도 잊는다.


프롬은 말했다.

“가지는 삶은 불안하고, 존재의 삶은 자유롭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갖는 것은 언제나 ‘잃을까 봐 두렵다’.
하지만 존재는 잃을 게 없다.
그저 ‘있기 때문’이다.


난 아직도 ‘갖는 인간’으로 살고 있다.
더 많은 일, 더 많은 성취, 더 많은 인정.
그런데 이상하게도, 손에 쥔 게 늘어나도 마음은 가벼워지지 않았다.
그때마다 프롬의 책이 내게 조용히 말했다.

“네가 가진 것보다, 네가 어떤 존재인가에 집중하라.”

그 문장을 읽고 나서,
나는 대화에서 한 박자 늦게 말하기를 연습했다.
‘대답’보다 ‘이해’를 먼저 시도해 보았다.
그때 신기하게도, 사람의 말이 ‘정보’가 아니라 ‘이야기’로 들렸다.
세상이 훨씬 부드럽게 들리기 시작했다.


언젠가부터 매일 스스로에게 묻는다.
오늘 나는 무엇을 가졌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느끼고, 누구로 존재했는가?

‘가지려는 인간’의 시대가 끝나면,
‘존재하는 인간’의 시대가 온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거창한 철학이 아니라,
한 번의 진심 어린 경청이다.


프롬의 철학은 결국 이렇게 속삭인다.

“너는 얼마나 많은 것을 가졌는가보다,
얼마나 깊이 살아냈는가가 중요하다.”

오늘 하루,
‘가지려는 손’을 잠시 내려놓고,
‘존재하는 나’를 천천히 느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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