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교원 역량강화 연수에서 팀 활동 중에 이런 질문을 받았다.
“당신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잠시 망설이다가 나는 이렇게 말했다.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습니다. 제 주변 사람들에게요.”
그때는 그것이 내가 바라는 삶의 모습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꽤 오랫동안 그 대답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오늘, 도서관에서 우연히 마주친 한 권의 책이
내 안에 조금 더 선명한 나, 조금 더 명확한 인간상을 남겼다.
단순히 ‘좋은 사람’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야 의미 있는 사람일 수 있을까를
다시 묻게 된 것이다.
세상은 늘 어떤 인간이 되라고 말한다.
좋은 시민, 합리적인 전문가, 책임감 있는 구성원…
다 맞는 말이지만
이제 나는, 그보다 더 내 마음에 와닿는 말을 찾았다.
미학적 인간.
그리고 그 이름 앞에 조용히 덧붙인다.
위버멘쉬, 즉 나를 초월하는 나.
책 『미학적 인간으로 살아가기』에서는
인간을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눈다.
정치적 인간, 과학적 인간, 노예적 인간,
그리고 미학적 인간.
그 설명을 읽는 순간, 나는 멈췄다.
"아, 나는 이 네 번째 인간이 되고 싶다."
다른 건 다 언젠가 지치고 닳지만,
‘창조적으로 사는 인간’은
끝까지 자기 삶을 자기답게 그릴 수 있구나.
나는 왜 자꾸 형식에 갇히는가
돌아보면,
나도 한동안 ‘정치적 인간’이었다.
늘 타인의 기준을 의식했고,
세상의 시선에 반응하며 살았다.
때로는 ‘과학적 인간’처럼 살아보기도 했다.
논리와 정답을 따라가며, 안정적인 결과를 좇았다.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
나는 노예적 인간처럼 살았던 것 같다.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해야 하니까.
그게 삶인 줄 알고,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모든 시간이 지나고 나서
지금의 나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이제는 미학적 인간으로 살고 싶다.
미학적 인간은 누구인가
자기만의 시선으로 세계를 본다.
사회적 규범이나 관습에 갇히지 않는다.
무모할 정도로 자기 삶에 충실하고,
어디서든 의미를 길어내며,
무엇이든 새롭게 연결해낸다.
그는 논리보다 감각을,
효율보다 몰입을,
안전보다 창조를 선택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자기 자신을 초월해 나간다.
위버멘쉬, 삶을 그리는 자
철학자 니체는 위버멘쉬를
도덕이나 관습의 울타리를 넘어
자신만의 가치를 창조하는 존재라고 했다.
나에게 그 말은
"너, 너답게 살아도 된다"는 말로 들렸다.
세상이 주는 인간상에 갇히지 말고,
내가 진짜 원하는 인간의 형태를
직접 그리라는 권유처럼 느껴졌다.
나는 오늘도 묻는다
오늘의 나는 어떤 인간인가.
정치적인가, 과학적인가, 노예적인가.
아니면,
조금이라도 미학적인가.
오늘 하루,
세상이 정한 답이 아니라
내가 그린 하루로 끝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나는
조금 더 위버멘쉬에 가까워진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