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무심함이라는 평범한 악

장애인식개선 콘텐츠 공모전 당선

by 닥터플로

우리는 바쁘다는 이유로

너무 늦게 알아챈다

넘어진 뒤에야, 턱이 높았다는 것을


그것은 장애물이 아니라

무심히 지나쳤던 시간들의 합,

무관심의 조각들이라는 것을


여전히 우리는 바쁘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짧은 다리를 재촉한다


턱의 높이를 헤아리지 못하고

넘어진 뒤에야,

서로가 쌓은 벽 앞에 주저앉는다.



다음은 시가 만들어진 배경인 제9회 대한민국 장애인식개선 콘텐츠 공모전 서울시장상 당선글입니다


무심함이라는 평범한 악에 대하여


2023년 여름, 우리 도에서 제일 많은 학교를 담당하는 지역교육청으로 발령받아 근무할 때였다. 폭염주의보가 연일 이어지던 그해, 낯선 업무와 담당 직원 공백으로 쏟아지는 민원과 감사원 답변 자료를 검토하며 머리가 뜨거워지던 나날, 심신이 지쳐 있던 나에게 시원한 계곡의 바람처럼 다가온 것은 다름 아닌 한 직원의 환한 미소였다.


그날은 저경력 직원 워크숍이 있던 날이었다. “안녕하세요, 팀장님. 이번에 전입한 ㅇㅇㅇ입니다.” 휠체어를 스스로 밀고 힘차게 들어온 그녀가 큰 목소리로 인사했다. 장애인에 대한 나의 막연한 편견과 달리, 그녀의 얼굴에는 밝은 미소와 활기가 가득했다. 그 밝은 모습은 업무에 눌려 찌푸려 있던 내 마음을 조용히 흔들어 놓았고, 그 일 이후로 나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업무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렇게 처음 만난 그 환한 미소는 2년이 지난 지금도 내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있다.


같은 해 연말, 나는 우리 지역의 최다 민원 발생 업무인 학생 수용 계획을 검토하며 한 사립 중학교에 거동이 불편한 학생이 입학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출산율 저하로 학생 수가 급감하는 현실에서, 적정학급 유지를 위해 학생 한 명이라도 더 유치하려 애쓰는 교감 선생님의 열정은 놀라웠다.


“학교에 엘리베이터가 없으니, 제가 아이를 업고 계단을 오가며 가르치겠습니다.”


역도선수 장미란과 같은 지역의 걸출한 인재를 배출해 온 유서 깊은 학교에 엘리베이터 같은 기본적인 장애인 편의시설이 없다는 현실을 마주하며 깊은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성인에 가까운 몸무게의 학생을 업고 매일 계단을 오르내려야 하는 선생님의 고단함과, 그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학부모의 마음은 어떠할까? 장애인 편의 시설 설치가 의무화된 복지국가에서, 아이들의 꿈이 자라는 교육 현장에 기본적인 편의 시설조차 없다는 현실은 아이러니했다. 어쩌면 이는 무심함과 안이함이 맞물려 빚어낸 결과일지도 모른다.


나는 즉시 행동했다. 관련 부서에 학교의 사정을 설명했고, 교감선생님께는 엘리베이터 설치를 위해 필요한 행정 절차와 지원 방법을 내가 아는 선에서 설명해 드렸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나는 일상에 주어진 바쁜 업무에 쫓겼고, 그 안타까운 일은 기억 저편으로 잊혀 갔다.


그로부터 1년 뒤, 나는 관내 학교의 현안사업과 관련한 업무로 그 학교를 다시 방문했다. 그리고 건물 한편에서 시작된 엘리베이터 공사 현장을 보았을 때, 내 가슴은 벅차올랐다. 무심코 지나쳤던 무관심의 어두운 그림자가 걷히는 순간이었다. 학생 한 명과 교감선생님의 작은 움직임이 놀라운 변화를 이끌어낸 것이다.


사실, 장애인 편의시설 설치에 대한 나의 관심은 교육청 지원으로 대학원 파견 중 연구했던 ‘적극행정’ 사례들과 맞닿아 있다. 내 논문의 연구 참여자들은 적극행정을 학생과 교육 수요자를 위한 이타적인 행동으로 정의하며, 교육 현장의 불편을 외면하지 않고 해결하려 노력한 사례들을 공유했다. 특히 다음의 특수학교의 사례는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었다.


1980년대에 지어진 건물은 당시의 장애인 편의시설 기준과 현행 기준이 크게 달랐다. 출입문은 휠체어가 지나가기에 너무 좁았고, 화장실도 멀리 떨어져 있어 장애학생들이 독립적으로 이용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환경이었다. 이에 실장님은 건물 개축을 지속적으로 요청했지만, 교육청은 내용연수를 이유로 이를 매년 반려했다. 대신 개축하면 매몰비용으로 사라질 외벽 단열과 창호 교체 등 15억 원 규모의 공사를 계획했었다.


그러나 그 직원은 “아이들이 15년 동안 이 학교에서 생활하는데, 지금 당장 불편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며 주장을 꺽지 않았다. 그리고 교육청과 학교, 장애인 단체까지 여러 기관에 상세한 자료를 준비해 개축 필요성을 피력했다. 이후 개축 공사로 인한 소음과 민원, 수업 방해 등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안전과 편의를 최우선으로 생각해 임시 대책까지 마련했다. 결국 개축 심의가 재검토되어, 교육청은 학생들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한 시설 개선에 나섰던 것이다. 이 사례는 적극행정이 제도를 넘어서 교육 현장의 실질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원동력임을 내게 깊이 각인시켰다. 이렇게, 교육현장에 근무하며 장애에 대한 관심을 갖고 행동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다만, 나는 그들의 노력과 외침에 무심했을 뿐이다.


한편, 나에게는 뜻하지 않은 사고로 하반신 장애를 갖게 된 오랜 친구가 있다. 풋풋한 20대 중반,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불행한 추락 사고였다. 그러나 그는 절망에 머무르지 않았다. 장애인 수영 선수로 활동하며 새로운 삶의 목표를 찾았고, 지금은 공사 현장의 안전 강사로 활동하며 자신과 같은 불행한 사고를 겪지 않도록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 사는 세상이 달라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멀리서 그의 삶을 지켜보며 나는 ‘장애’라는 말이 얼마나 큰 의미를 담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누구나 언제든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잊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시간은 흘러, 2025년 1월 나는 집 근처 학교의 행정실장으로 발령받아 첫 출근을 했다. 출근길 현관 자동문이 나를 반기고, 2년 전 직원 워크숍에서 만났던 그 밝은 미소의 동료를 다시 만났다. 마음 한구석에 장애를 가진 동료에 대해 미묘한 걱정이 있었지만, 그것이 기우였음은 금세 드러났다. 그녀는 자신의 업무는 물론, 각종 민원 전화와 선생님들의 부탁까지 척척 해결하는 팔방미인이었던 것이다. 그 직원을 지켜보며, 장애를 안고 맡은 일을 당당하게 해내는 오랜 친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애에 대한 편견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한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여직원이 내 자리로 조심스레 다가와, 선남선녀 사진과 함께 예쁘게 장식된 결혼식 초대장을 건넸다. 학교 업무 사정을 고려해 겨울방학 기간으로 결혼 날짜를 정했다는 사려 깊은 말에 가슴이 따뜻해졌다. 지금 그 직원은 행복한 결혼생활을 이어가며 예쁜 아이를 출산하고 육아휴직 중이지만, 여전히 행정실 식구들과 다양한 경로로 소통을 이어가고 있다.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는 모습을 서로 기쁘게 바라보며, 우리는 그렇게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 직원은 내게 장애는 삶의 한 모습일 뿐임을 보여주었고, 나는 서로의 다름을 존중할 때야 비로소 함께 걸어갈 길이 열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약일지도 모르나 나는 이러한 경험을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에 담긴 ‘악의 평범성’에 빗대어 이야기하고 싶다. 악은 괴물처럼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부재' 즉, 생각하지 않는 평범함 속에서 태어난다는 그 섬뜩한 통찰 말이다.


우리는 장애에 대한 다양한 편견과 규정, 절차, 예산 문제,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고통을 합리화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마치 나치 독일의 관료 아이히만이 자신의 행동을 '명령에 대한 충실'로 정당화했던 것처럼, 우리 사회의 무심함이 또 다른 형태의 '평범한 악'을 키우고 있는지 말이다.


아렌트가 말한 ‘사유의 부재’를 끊어내는 일은 거창한 행정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눈앞의 사람을 편견 없이 한 명의 인격체이자 동료, 이웃으로 바라보는 데서 출발한다. 나는 장애를 ‘도와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사람’으로 인식하는 그 순간이, 우리가 악의 평범성을 넘어서는 첫걸음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모두가 함께하는 세상’은 먼 미래의 이상향이 아니다. 지금 우리 일상 속에서, 작은 관심과 이해가 모여 만드는 현실에 있다.


나는 오늘도 교육현장에서 배우고, 함께 걸으며, 누군가에게 편견 없는 작은 힘이 되고자 한다. 장애에 대한 편견은 다른 곳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관심을 놓는 순간에 싹트는 것임을 나는 함께 살아가는 동료의 환한 미소에서 보았던 것이다.



나이가 들어도 상을 받는다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