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가 없는 삶에 대하여
밤에 프란츠 리스트의 ‘르 말 뒤 페이(Le Mal du Pays)’를 틀었다.
라자르 베르만의 연주는 처음엔 맑았지만, 금세 어딘가 무겁고 멀어졌다.
돌아갈 수 없는 시간에 대한 그리움이 방 안을 서서히 채웠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나는 특별히 돌아갈 ‘고향’이 없는데도, 왜 이렇게 울컥하는 걸까.
그럴 땐 커피를 한 잔 더 내리면 된다.
커피는 적어도 나를 배신하지 않으니까.
마흔을 앞두고 결혼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예전엔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굳이 결혼이라는 제도가 필요 없다고 여겼다.
다른 생활방식과 경제력이 부딪히면 불화가 생길 거라 믿었고,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서 결혼은 사치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주말 아침, 알람 없이 느긋하게 일어나
어제 사둔 단팥빵과 커피로 늦은 아침을 해결하는 그 평화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요즘 부모님을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얼마 전 건강검진에서 작은 이상 소견이 나와, 간단한 수술을 받으셨다.
“괜찮다”는 말을 하시지만, 그 괜찮음이 예전의 ‘정말 괜찮음’이 아니라는 걸 안다.
내 몸도 예전 같지 않다.
수영을 하고 나면 근육이 풀리기까지 시간이 더 걸리고,
러닝을 하다 보면 호흡이 거칠어지는 시점이 조금씩 빨라진다.
종아리가 뻣뻣해질 때면, 체력이 서서히 뒤로 물러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다.
세 살 조카는 이제 제법 단어를 또박또박 말하기 시작했다.
“삼촌!” 하고 부르는 목소리는 힘이 넘치는데,
그 속도대로라면 내가 늙어가는 속도와 거의 반비례 관계다.
결혼은 이제 단순한 결합이 아니다.
누군가와 오래 함께하며, 서로의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일.
기쁨과 슬픔, 평범한 하루를 나누는 일.
함께 늙어간다는 건, 혼자 늙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차이점이라면, 러닝 후 서로의 땀 냄새를 크게 문제 삼지 않는다는 점 정도일까.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속 쓰쿠루처럼,
나도 한동안 색이 빠진 채 살아왔다.
일상은 유지됐지만, 그 안에 체온을 나눌 사람은 없었다.
쓰쿠루가 순례 끝에 다시 사랑을 향해 걸음을 옮겼듯,
나도 이제는 나만의 순례를 시작해야 할 때인지 모른다.
쓸쓸함은 혼자 있을 때만 오는 게 아니다.
같이 있어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곳이 더 고독할 수 있다.
하지만 진심으로 곁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람과 함께라면,
쓸쓸함마저도 조용히 녹아내릴 것이다.
그리고 때때로, 수영을 마친 뒤 카페에 앉아
“오늘 물 좋았네”라고 웃으며 얘기할 수도 있다.
그 짧은 대화만으로도 하루가 가벼워진다면,
그게 아마도 함께 살아가는 이유일 것이다.
나는 바란다.
스스로를 사랑할 줄 알고, 삶의 의미를 함께 찾아 나설 수 있는 사람.
경제적 조건보다 서로의 일상을 끝까지 견뎌낼 수 있는 사람.
그 사람과라면, 결혼이라는 이름이 아니어도 좋다.
다만, 끝까지 서로의 옆에 남아 있는 관계면 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내 순례길에서 같이 뛰어줄 수 있는 사람이면 더할 나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