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커피와 함께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커피 머신을 켰다. 그 기계가 내뿜는 작은 소음은, 세상과 나 사이에 아주 느린 간격을 만들어 주는 듯했다. 토스터에 빵을 살짝 구웠다. 오늘은 친구가 선물해준 에티오피아산 원두의 마지막 샷이었다. 진한 향이 주방 가득 번지자, 문득 생각이 흘렀다. 도대체 언제부터 내가 이렇게 커피를 좋아하게 된 걸까.
아마 2009년, 군대를 막 제대하고 난 뒤였을 것이다. 그때 세상은 ‘된장녀’라는 말에 열광했다. 스타벅스를 드나드는 여자를 허영의 아이콘처럼 부르는, 지금 생각하면 조금 우스운 시대였다. 커피 한 잔에 5천 원이라니. 전역한 내 눈엔 그저 사치처럼 보였다.
하지만 대학교의 한 수업에서 스타벅스 케이스 스터디를 하면서, 나는 커피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 아라비카와 로부스타, 산지별 기후와 토양이 만들어내는 풍미, 추출 방식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미묘한 결과들. 그리고 로스팅 단계에 따라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는 사실. 작은 원두 한 알에 이토록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다는 게 놀라웠다. 그때부터 나는 카페를 드나들며 커피를 마셨다. 마치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듯한 기분으로.
2009년에서 2013년, 그 시기는 부산에도 ‘커피 1세대’라 불릴 만한 카페들이 생겨나던 때였다. 아마도 그때부터 대학의 문화가 술문화에서 카페문화로 바뀌기 시작한게 아닐까 싶다. 대학 시절의 기억은 술자리보다는 카페의 풍경으로 더 또렷하다. 친구들과 나눈 대화도, 시험을 준비하던 긴장된 순간도, 모두 커피 향과 함께 떠오른다. 어쩌면 내 대학 시절의 풍경은 온통 커피 색깔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프리카 원두를 좋아한다. 특히 케냐와 에티오피아. 물론 브라질의 아라비카, 베트남의 로부스타도 뛰어나다. 하지만 내 입맛은 언제나 아프리카 쪽으로 기울었다. 신맛과 쓴맛이 오묘하게 섞여 있는 그 맛은, 마치 낡은 레코드판에서 흘러나오는 재즈처럼 생생하고 원초적이었다. 커피의 발상지가 아프리카라는 사실을, 입안에서 직접 확인하는 순간 같았다.
2010년, 내일로 여행을 하며 강릉과 홍대의 카페를 찾아다녔던 기억도 난다. 그 시절엔 그곳이 커피의 성지였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부산이 전국적으로 커피 도시로 주목받는다. 왜일까. 일자리가 부족해 창업이 많아서인지, 바닷바람이 커피 향과 어울려서인지, 확실히는 알 수 없다. 다만 대기업이 없는 도시에서, 커피가 부산의 새로운 상징이 된 것은 어쩐지 씁쓸하면서도 묘한 일이다.
내가 자주 가던 카페들을 떠올려 본다. 온천장의 모모스. 처음엔 보신탕집 옆 작은 가게였다. 직접 볶은 원두를 핸드드립으로 내려주던 그 시절, 나는 이 작은 카페에서 세상에 대한 믿음을 배웠다. 지금은 세계 바리스타 챔피언을 배출하고, 커다란 부지를 확장한 부산의 대표 카페가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그 작은 공간의 고요함을 그리워한다.
덕천의 마비스 커피는 또 다르다. 크게 성장하진 않았지만,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부산 북구라는 제한된 무대에서, 변함없는 커피 맛을 이어가는 그 고집스러움이 오히려 오래된 책장 같은 안도감을 준다.
블랙업과 JM 커피는 부산 대형 카페의 얼굴이다. 특히 JM은 컴포즈라는 저가 브랜드를 성공시켜 엑시트에 성공했고, 본점을 새 건물로 옮겨 번쩍번쩍한 카페로 변모했다. 그 화려함 앞에서 나는 잠시 멈칫했다. 화려함이 주는 낯섦과 동시에, 시간이 흘렀음을 확인하는 묘한 기분.
1세대 카페들의 성공 이후 부산에는 저가형 프랜차이즈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컴포즈, 더벤티, 텐퍼센트, 블루샥. 그리고 내 대학 친구가 만든 영커피. 그 친구가 점점 영역을 넓혀가는 모습을 보며 나는 놀라고, 또 비밀스럽게 기뻐했다.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커피라는 장르로도 저렇게 무언가를 이룰 수 있구나 싶어서.
오늘 아침, 마지막 원두로 내린 커피를 다 마셨다. 컵의 바닥에 남은 흔적을 바라보며, 내일은 새로운 원두를 사야겠다고 생각한다. 어떤 원두를 살지는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아마도 그게 커피의 묘미일 것이다. 매번 새로운 원두, 새로운 맛. 그 예측할 수 없음 속에서 나는 또다시 한 잔을 내린다. 그리고 그 한 잔은, 내 하루의 문을 열어주는 작은 주문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