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자전거를 탈 줄 모르는 사람 #09
어디가 가장 아프세요?
진료실의 불빛은 조금 희뿌옇게 번져 있었다.
눈이 뿌옇게 보이는건지 불빛이 뿌옇게 된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 날도 약을 처방받기 위해 병원에 들렀다.
몇 년째 복용 중인 약, 반복되는 진료, 그 모든 것이 ‘유지’는 해줬지만,
더 나아진 건 없었다. 억누르는 것 외엔 변화가 없었고 남아 있는
기대도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지금 다니고 있는 병원 원장님께는 죄송하지만
대학병원 진료를 예약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대학병원은 역시 대학병원이었다.
예약부터 진료까지, 길게 이어지는 대기 시간, 무표정한 환자들,
차례를 기다리며 나도 그들 중 하나가 되었다.
내 차례가 되어 예진실 문이 열리자, 상담사 한 분이 조용히 앉아 계셨다.
마주 앉으니 이상하게도 긴장감이 밀려왔다.
질문들이 이어질수록, 마치 심문을 받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런 기분은 오래 가지 않았다.
“어디가 가장 아프세요?”
그 한마디에, 천만 근의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마음이 아프다’는 말을 들고 이곳에 왔는데,
누군가 내게 ‘어디가 가장 아프냐’고 물은 건 처음이었다.
그 물음은 묘하게 역설적이었다.
‘아프다’는 걸 설명해야 하니, ‘진짜 아픈 곳’을 찾아야 했다.
상담사 선생님은 아무 말 없이 기다려주었다.
조언도, 지시도, 위로도 없이 그저 기다렸다.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아주 조심스럽게 말했다.
“여기가… 제일 아파요.”
눈물이 멈출 때까지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료실에서도 나는 또 울었다. 교수님도 놀란 눈치였다.
너무 오래 울어서 그런가, 이상하게도 속이 시원했다.
울고 싶은게 아니라, 그렇지 않으면 한 마디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
“회사를 다니고 있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입니다.”
교수님은 그렇게 말했다. 그 말에 어깨가 무너지는 듯했다.
나는 그저 버텼을 뿐인데......
‘대단하다’는 말은 내가 얼마나 오래 고통 속에 있었는지를
말해주는 것이기때문이었다.
“회사를 잠시 떠나세요. 어릴 적의 트라우마와 지금의 일상을
완전히 단절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뭘 해도 즐겁지 않은 게 아니라, 뭘 하는 게 불가능했던 거죠.“
교수님은 그렇게 덧붙였다. 그 말이 오랜 시간 묶여 있던 숨통을
조금 열어주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억지로 누굴 위해 살지 말고, 하고 싶은 것만 하세요.”
“약은 감정을 잠재우는 게 아니라, 감정을 견딜 시간을 주는 겁니다.”
그날 나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인정’을 받았다.
충분히 잘 버텨왔다고.. 그 말 한마디가 수년간의 고통보다 더 큰 위로였다.
보통 나와 같은 환자들은 초기에 일을 떠나거나 감정이 무뎌진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버티고 있었다.
그래서 더 고착된 상태였다.
단순한 불안이나 불면이 아니라, 삶의 방향 자체가 흔들린 상태...
모든 걸 한 번에 바꾸는 건 무리였다.
그래서 조금씩, 아주 조금씩 바꾸기로 했다.
증상을 없애는 치료가 아니라, 함께 살아내는 치료를 선택했다.
병원을 너무 오래 다닌 것도 좋아지고 있다고 착각한 것도 어쩌면 내 탓이었다.
“괜찮다”는 말을 믿고 싶었던 내 마음이 자초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아프다고 말하는 것조차, 살아 있으니까 가능한 일이라는 걸...
그날 이후 나는 조금 다르게 살기로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조용히 나 자신을 기다려주는 시간, 그것이 치료의 시작이었다.
누군가 내게 또 묻는다면,
이제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여기가… 가장 아파요.”
그리고,
“그래도 여기서부터 다시 살아보려 해요.”
병원을 나서며 큰 숨을 들이쉬고 둘러보니 자전거를 타고 가는
아버지와 아들이 보였다. 지나가는 자전거를 보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래 괜찮을 거야... 넘어져도 괜찮아... 다시 일어날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