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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지그문트바우만)

지그문트 바우만

by 글씨가 엉망

" 개인의 이윤 추구가 동시에 공익을 위한 최선의 매커니즘을 제공한다는 주장은

의혹에 싸였고 사실상 거짓으로 밝혀졌다. "


이 책의 서문 첫페이지에 나와있는 말이다.

"소득 불평등의 증가는 사회적 관점에서 분명 바람직하지 않지만 모든 사람의 부가 늘어나는 상황에서라면 반드시 문제라고는 할 수 없다. 반대로 경제발전의 결실

대부분이 이미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는 상대적 소수에게 돌아간다면 그것은 분명히 문제일 것이다. 지금 바로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

-책 중 제러미워너의 말


이 책의 앞부분부터 치열한 논리적 공방이 있을 수 있는 내용이 진행되기 시작하고 있고, 아마도 이부분에서 가장 문제적인 이야기가 진행 되는 것 같다.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결론은 '전체적인 경제성장 속에서의 성장속도의 차이는

규모의 성장에 있어 영향을 주지 않으며, 경제성장의 결과는 상위에서 하위까지

모두 긍정적인 효과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굳이 문제로 삼을 필요는 없다'라고

이해되어졌다.


즉 빈부의 격차의 차이가 심화되는 것은 전체적인 경제성장 속에서는 큰 의미가 없다는 말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위 90%의 경제성장 속도가 상위 10%와의 속도보다 다소 뒤떨어 진다면 여건과 환경에 의한 차이로 볼 수 있지만, 지금 상황이 그러한 상황이 아닌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상위 10%....상위 1%의 경제성장 속도만 보더라도 극빈층의 성장이라 볼 수 도 없는 성장의 속도와 비교하면 비교의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의 순환은 다시 부에게로 , 빈곤의 순환은 다시 빈곤에게로 이것이 지금의 경제

순환 구조의 모델이 아닌가 생각한다.


모든 경기가 불황인 상황에서 돈은 금융상품에 몰리게 되고 결국은 금리와 투자의 싸움에서 발생하는 버블 또는 역버블은 또 다른 위기가 되지만, 이는 중산층 이하의 90%에 해당되는 이야기일뿐 상위 1%에게는 다시금 부의 증식을 위한 기회가 될 수 있다.


바우만은 여기서 질문을 던진다. 1%의 부에 침묵하는 99%에게 ...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또 다른 의문점이 여기서 생긴다. 평등은 부와 빈곤의 해법이 될 수 있나? 평등에서 오는 비효율과 인간의 본성에 대한 변수는 누구의 짐으로 지워 질 것인가? 만약 부의 성장속도가 비슷하고 상위 10%와 하위 90%의 경제규모만 차이가 있다면 과연 불평등을 해소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문제는 평등의 문제라기 보다는 규모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1인이 움직 일 수 있는 경제규모는 시간이 갈 록 그 규모가 커지고 있으며 다양한 형태와 방법으로 진화하고 있다.

이러한 이윤의 추구는 개인의 이윤추구이며 하위90%에게 돌아갈 방법은 전무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형태와 방법에 대한 접근을 할 수 없는 경우에는 결국 과거와 같은 형태의 경제성장을 기대할 수 밖에 없음은 자명한 일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는 접근기회로 경제활동에 대한 대가와 그 활용에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이윤추구의 방법은 다양한 형태의 재산권의 사용에 대한 권리, 새로운 통화방식과 유통에 대한 변화, 독점적 사용권 확보에 따른 독과점으로 이윤추구의 형태는 진화하고 있다.

또한 그 규모는 과의 상위 10%의 경제규모를 훨씬 능가하는 규모를 보이고 있으며, 이러한 결과는 재분배 또는 사회적투자 보다는 이윤의 재투자에 따른 부의 재창출에 대부분 쓰여지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1%의 부에 대한 99%의 침묵의 이유를 묻는가?

감히 이렇게 생각해본다.


건너갈 수 있는 그리고 지향 할 수 있는 곳 인지의 여부가 질문의 핵심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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