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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생각나는대로의 단편적인 생각
18화
쇼펜하우어...삶과 수용의 인정 2
by
글씨가 엉망
Nov 9. 2025
많은 철학자와 문학가에 영향을 미친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는 흔히 염세주의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철학은 단순한 절망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에 대한 통찰’이었다.”
단순히 염세주의와 삶에 대한 공허함과 무의미만을
안겨주었다면 니체에서 릴케에 이르는 수 많은
사유의 동인(動因)이 되지는 않았으리라
쇼펜하우어의 삶은 우선 의지에 대한 정의가 명확하다.
그가 말하는 의지란 인간의 의지,
신의 뜻과 같은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불립문자의 영역이며, 체화되지 않는 그런 의지를 의미한다.
의지는 이성의 논리 바깥에 있으며,
형태로 붙잡히지 않고, 언어로 증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존재한다. 이유도 목적도 없이,
눈부시게, 혹은 잔혹하게 존재한다.
의지는 곧 세계이며 그 형태와 의미는 추측도,
합리적이지도, 목적도 없는 그저 존재하는 것이다.
왜 존재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존재하고 있으므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후대 실존주의자
사르트르의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주장과 닮아있다.
다만 사르트르가 그 실존 속에서 의미를 창조하려 했다면,
쇼펜하우어는 그 마저도 무의미하다고 본 것이다.
이는 곧 존재에는 이유도 의미도 없는 것이며
표상으로 드러난 것이 곧 세계로 인식하는 것이라는
맹목적 의지의 그림자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는 삶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깊은 절망의 바닥에서 수용이라는 조용한
깨달음에 닿으려 했다. 삶은 고통으로 가득하지만
그 고통조차 의지의 한 형태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맹목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묻는다.
"고통을 부정하려 드는가, 아니면 그것조차
네 존재의 일부로 품으려 하는가"
세계의 근원은 합리성도 목적성도 없이 단지 맹목적인
의지의 발로이며 그 표상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기에
삶의 의미를 억지로 만들어내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도달 한 것이며, 존재는 스스로 충분하다고 하는 것이다.
삶에 대한 그러한 관점은 결국 고통을 덜어내는 삶 정도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쇼펜하우어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삶에대한 부정이 아닌 존재에 대한 맹목적성과 비합리성을
인정하고 표상에 대한 부정도 의지의 발로도
기대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라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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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충격으로 멈춰버린 삶과 불안을 글로 다듬어 나가는 일기이자 에세이 형식의 기록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일상의 회복을 찾아가고 있는 내용을 공유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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