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어떻게 나를 마주하게 하는가.
론 뮤익의 개인전 소식을 들었을 때,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
벌써 8년 전, 첫아들이 네 살 무렵이던 2017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 소장품 전 – Highlights에서 처음 론 뮤익의 작품을 마주했다.
그날, 론뮤익의 작품을 보고 전시장에서 까불던 아이가 갑자기 멈춰 섰다.
무섭다며 내게 달려왔지만, 어느새 다시 작품 앞에 서서 꽤 긴 시간 머물러 있었다.
올해 다시 론 뮤익 전시를 찾았다.
아이와 함께 가려고 했지만 연휴라 입장 마감.
전시 종료일이 가까워진 어느 날, 결국 혼자 급히 다녀왔다.
네 살 아이가 느꼈을 '무섭다'라는 감정을 많은 사람이 공감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지하공간에서 전시된 것도 분명 계산된 의도였을 것이다. 이번엔 무섭다는 감정보다 ‘보는 내가 무서운’ 감정이 먼저 들었다.
크기나 시선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서 내 모습을 본 듯한 낯선 자의식 때문이었다.
울퉁불퉁 튼튼해 보이는 몸, 그러나 살결은 유독 뽀얗고 연약해 보였다.
허리가 휠 정도로 보잘것없어 보이는 나뭇가지를 껴안은 여성의 조각.
강인함과 나약함, 현실과 상징이 동시에 존재하는 몸.
그 몸은, 무언가를 놓지 못하는 내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아기를 안고 있는 여성 작품은 더욱 뼈아팠다.
양손엔 쇼핑한 비닐봉지를 들고 에너지가 있어 보이지만 정작 아이의 눈을 마주하지 못한다.
내려간 입꼬리, 패인 팔자주름, 힘없이 흩어진 시선.
너무 나 같아서, 너무 지금의 내 마음 같아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론 뮤익은 극사실주의 작가로 불리지만, 그의 작품은 '사실적인 사이즈'로 제작되지 않았다.
크기를 축소하거나 과장해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들고, 그 낯섦 속에서 감각을 깨운다.
실제처럼 보이지만, 실제보다 더 낯선 존재.
그건 ‘사실’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진실’을 꺼내 보이는 방식이다.
작가의 의도가 그렇든 아니든, 나는 그 작품들 앞에서 사실보다 진실을 마주했다.
강해 보이지만 하얗고 여린 피부가,
내게 느껴지는 짐이 무거워 막상 코앞에 있는 아들의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허공을 응시하는 눈을 통해 나를 마주한다.
짐처럼 느껴지는 관계들 속의 나.
그 모든 것이 작품 안에 있었다.
자기 연민을 넘어, 내가 지금 어떤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경험.
예술의 힘은, 어쩌면 바로 그런 ‘마주함’에서 오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