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를 믿는다는 것'
뜻하지 않게 축구 경기 표를 얻게 되어, 급히 상암 월드컵경기장에 가게 되었다.
두 아들은 신이 났지만, 나는 원래 일할 계획이 있었기에 ‘가준다’는 마음으로 따라나섰다.
1층 홈플러스에서 간식을 바리바리 챙기고, 주차장과 계산대의 인파를 뚫고 나오는 길엔 짜증이 슬슬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경기장에 들어선 순간, 분위기에 휩쓸렸다.
서포터즈들의 함성, 축구에 진심인 관중들의 복장과 눈빛.
그 열기에 나도 모르게 흥분되었고, '정말 왔구나' 싶은 실감이 났다.
쉼 없이 뛰는 선수들의 모습을 가까이서 보니 절로 응원이 나왔다.
그리고 그날, 내 마음과 눈에 오래도록 남은 장면이 세 가지 있었다.
첫 번째는,
경기장 한쪽에서 열심히 몸을 풀고 있던 대기 선수들의 모습이다.
공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 우연히 마주한 장면이었다.
경기에 뛸 수 있을지조차 모르는 상황에서, 누군가는 계속 달리고, 팔을 돌리고,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엄마의 마음이 겹쳐져서일까, 그 모습이 짠하고도 아름답게 느껴졌다.
‘나도 뛰고 싶다’는 마음만 있는 게 아니라,
‘언제든 뛸 수 있다’는 마음으로 준비하는 자세.
그 뜨거운 준비의 에너지가, 이상하게도 내 안까지 파고들었다.
똑같이 뛰고 있지만, 더 간절한 사람은 멀리서도 보인다는 걸 그날 실감했다.
두 번째는,
후반전 시작 전, 선수들이 원을 이루고 어깨동무를 하며 마음을 모으던 순간이다.
경기라는 전투를 앞두고 다시 한번 중심을 다잡는 의식처럼 보였다.
기술 이전에, 경기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믿음’이 있다는 걸 그 순간 깨달았다.
그 모습이 어쩐지 경건하게 느껴졌다.
세 번째는,
그 치열한 와중에도 자꾸만 내 시선을 잡아끌던 예쁜 색의 조끼와 축구화였다.
멀리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색들이 왜 그렇게 예쁘던지.
삶의 한복판, 긴장과 경쟁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아름다움에 반응한다.
그건 어쩌면 인간에게 주어진 본능 같은 게 아닐까.
살아남기 위한 싸움 속에서도 색과 형태에 감응하는 감각.
우리가 예술을 만들고, 또 향유하게 되는 이유는 그런 감각 때문인지도 모른다.
뜻밖에 얻게 된 좋은 기회는,
세 남자를 위한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위한 시간이 되어주었다.
경기장 한복판에서, 나는 내 삶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누군가는 필드 위에서 전력을 다해 뛰고,
누군가는 그 뒤편에서 차례를 기다리며 몸을 풀고,
또 누군가는 마음을 모으며 다시 뛰기 위한 준비를 한다.
그리고 나는 지금, 내 삶의 어디쯤에 서 있을까.
아마도 여전히 코트 뒤편에서 몸을 풀며,
내 차례를 기다리는 중일지도 모르겠다.
서툴지만 멈추지 않고,
그렇게 또 한 번 이야기를 이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