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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경 Jan 09. 2024

있잖아,

  있잖아, 나는 네 입에서 있잖아, 하고 시작하는 문장들을 참 좋아해. 네가 있잖아, 하고 말하기 시작하면 그 말을 하기 위해 고민했던 시간들도 함께 전달되는 것 같았거든. 그러면 그 말은 내 마음에 더 소중하게 남아 두고두고 꺼내보게 되더라.


  그래서 말인데 있잖아, 나는 아직 네 생각을 꽤나 자주 하는데, 너도 가끔은 내 생각을 할까? 네가 나에게 남겨준 것들은 내 일상에 너무나도 깊숙이 스며들어 있어서 아주 작은 것도 너를 떠오르게 하는데, 너의 삶에도 내가 떠오르는 것들이 있을까?


  네 덕분에 갖게 된 여러 습관들 중 독서 습관을 제일 좋아해. 악보는 커녕 책에조차 연필 자국을 내기 두려워하는 나에게 메모지를 붙여가며 읽는 법을 알려줬잖아. 같은 책을 각자 읽은 후, 서로가 남겼던 흔적을 공유하기 위해 책을 교환해서 다시 읽었을 때 우연히 우리가 같은 곳에 멈추었던 흔적들을 보면서 이런 게 운명이 아닐까 하는 유치한 생각을 하곤 했는데, 너도 그랬을까? 나는 그 후로 내가 흔적을 남기며 읽었던 책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빌려주기 시작했어. 다른 사람이 내가 멈췄던 곳에 잠시 멈춰 그들만의 흔적을 남겨서 돌려주는 일은 나에게 너무나 소중한 일이 되어버렸거든. 아무튼, 우리가 꽤 자주 같은 곳에 멈추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 후로 우리는 틈만 나면 서로에게 좋아하는 책을 선물하게 되었지. 서로가 어디에서 멈출지 너무나도 궁금해했으니까.


  있잖아, 우리가 서로에게 말도 한 적 없는데 우연히 같은 책을 읽고 있었던 책, 혹시 기억나? 이슬아 작가님의 ‘너는 다시 태어나려고 기다리고 있어’ 말이야. 나는 너를 생각하면 이 책이 가장 먼저 떠올라.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이 책을 너도 며칠 전에 읽었다니. 같은 책, 같은 부분이라니. 우연이 두 번 겹치면 운명이라는 말이 있잖아. 우리는 만나기 위해 태어난 거였어. 그것 말고는 우리를 설명할 수 있는 표현이 없었어. 우리가 함께 멈춘 부분을 다시 적어볼게.


언젠가 네가 그만 살고 싶은 듯한 얼굴로 나를 봤던 걸 기억해.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어. 네가 계속 살았으면 좋겠는데 고작 내 바람만으로 네가 살아서는 안 되잖아. 살아가려면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들이 있어야 하잖아. 울다가 잠든 네 모습을 한참 봤어. 아침이면 일어나고 싶은 생을 네가 살게 되기를 바랐어. 왜냐하면 나는 너 때문에 일찍 일어나고 싶어지거든. 일도 하고 너랑도 놀아야 해서 하루가 얼마나 짧은지 몰라. 네 규칙적인 숨소리를 들으며 이 책의 마지막 시를 읽었어.


  내가 좋아하는 신형철 작가님의 글 ‘무정한 신 아래에서 사랑을 발명하다’에도 비슷한 얘기가 나와. 가브리엘 마르셸은 “사랑받는 것은 ‘당신이 죽지 않아도 된다’라는 말을 뜻한다”고 말했대. 신형철 작가님은 이 문장은 뒤집어도 진실이라고 덧붙이셔.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은 네가 죽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면서 동시에 내가 죽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제 나는 어떤 불가능과 무의미에 짓밟힐지언정 너를 살게 하기 위해서라도 죽어서는 안 된다. 내가 죽으면 너도 죽으니까, 이 자살은 살인이니까.”


  너도 알다시피 나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았어. 그런데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은, 네가 죽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면서 동시에 내가 죽지 않아도 된다고 것이래. 이슬아 작가님 글처럼 나는 네가 계속 살았으면 좋겠는데 고작 내 바람만으로 네가 살아서는 안 되니까. 나는 죽고 싶지 않기에, 그리고 또 살고 싶기에 너를 사랑했나 봐. 그래서 내가 너를 아주 많이 사랑했나 봐.


  그리고 또 있잖아, 우리는 낭만과 사랑에 대해서도 얘기를 정말 많이 했어. 나는 낭만이라는 단어 자체를 좋아했는데 너는 어원 찾아보는 걸 좋아했잖아. 낭만이라는 단어는 일본의 한 작가가 일본어로 번역하면서 낭만주의, 'romance'를 일본 발음대로 음차 한 거라는 걸 알고 얼마나 실망했는데. 나에게 낭만은 내가 사는 유일한 이유인데 말이야. 심지어 낭만(浪漫)이라는 한자식 표현은 말 그대로 물결이 흩어지듯 제멋대로 하라는 뜻이었다니. 이제야 말하지만 나는 ‘낭만’에 대한 우리만의 뜻을 새로 써보고 싶었어. 우리에게 낭만은 물결이 흩어지는 것 그 이상이었으니까.


  낭만을 이야기할 때 우리가 나눈 음악과 예술의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들도 빼놓을 수 없더라. 같이 음악을 들은 후면 우리는 꼭 음악에 담기는 것들을 얘기하곤 했어. 누군가는 말도 안 된다며 비웃었지만 우리는 음악에는 냄새도 담긴다며 예술의 힘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좋아했지. 우리의 추억이 담긴 음악들을 듣다 보면 어디선가 네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이제 다시는 맡을 수 없는 냄새인데 우연히 재생되는 그 음악만 들으면 내 주변이 네 냄새로 가득 차 버려서 길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어. 혹시 너도 내 생각이 나서 못 듣게 된 노래가 있을까?


  있잖아, 나는 사실 여전히 영원한 것은 없다고 생각해.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은 결국 나를 두고 떠날 것이라는 불안을 안고 살아. 지금 네가 내 옆에 없듯이 말이야. 그래서 나는 예술만을 사랑할 것을 다짐했어. 예술은 그 긴 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를 지켜왔기에 나를 두고 떠나지 않을 것 같거든. 내가 잠시 다른 것을 좋아하게 되어 멀어지더라도 예술은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거든. 사랑이 많은 사람이고 싶어서 작은 것들까지 많이 사랑하며 살고 싶었는데 그것들이 떠날 때마다 내가 너무 아프더라. 그래서 내가 나를 지켜야겠다고 생각했어.


  마지막으로 있잖아, 나는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이라는 개념이 비슷해서 행복했어. 네 말처럼 ‘행복’만큼 추상적인 단어가 또 없지만, 삶이라는 것은 이 단어를 구체적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어. 너를 만나는 동안 나의 행복을 구체화시킬 수 있었어. 책의 같은 부분에서 멈추었을 때, 우연히 만난 길고양이에게 츄르를 줄 때, 각자의 낭만을 담은 시선을 공유할 때, 그리고 서로에게 자신의 행복을 알려줄 때. 우리는 이제 각자의 행복을 알아서 구체화하는 사이가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너의 행복이 궁금해. 너는 너의 낭만과 행복으로 너의 삶을 채워나가고 있을까?


/2022.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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