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멀구슬나무

by 김혜련

멀구슬나무


김혜련


작년 여름에 갈무리해둔

잘 마른 시간의 구근을 꺼내

얇은 먼지 한 겹 공들여 닦는데

겨울 동천 어귀에 두 발을 묻고

묵언 수행 중인 멀구슬나무와

눈이 마주쳤다


키가 유난히 큰 체격이 우월한 유전자

쭉쭉 뻗은 가지마다

실팍한 근육이 차곡차곡 쌓이고

어디선가 놀러온 참새 서너 마리

무인카페에 놀러온 손님들처럼

오후 내내 수다를 즐기다가

부리카드 긋고 날아간다


부리카드 온기가 남아 있는 정수리에

미백크림 바른 대추알들이

황금 왕관을 만들어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그러고도 남은 열매들은

일제히 땅바닥으로 내려와

산책 나온 시민들의 신발 바닥을

마이크 삼아 아롱다롱 이야기 파일을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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