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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론 Nov 07. 2024

쓰러지다

늦은 저녁, 근무를 마치고 피로를 풀려고 샤워실로 향했다. 평소에 비해 부족한 운동을 마친 후 낙심을 씻어내려 튼 물줄기 사이로 등에 검은 반점들이 보였다. 대상포진이었다.




몸속 신경들에 숨어있다가, 내가 가장 아플 때 튀어나와 옆구리와 등을 덮는다. 간혹 몸살감기로 생각하고 밤을 지새우다 부둥켜안은 손에 물집이 잡히기도 했다.


늦은 시간에, 응급실에 가긴 아깝게 느껴져 아침에 병원을 찾기로 했다. 불쾌한 통증들이 목구멍과 등줄기를 넘나들며 잠을 깨웠다. 잠깐 잔 줄 알았는데, 이미 해는 중천이었다.


살기 위해 움직이는 몸짓에는 주저함이 없다. 머릿속에는 살아야겠다는 일념만이 가득한 채, 병원으로 향했다. 약을 처방받고 팔에 꽂힌 바늘을 통해 시원한 수액이 들어온다.




'역시 건강이 최고'라는 상투적인 안부 전화들을 마치고 눈을 감는다. 너무 오래 자버린 탓에, 더는 잠이 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한참을 누워 아무것도 없는 천장을 살핀다.


그래도 다행인 건, 중요한 시험과 서류준비를 마쳤다. '이미 거의 다 낫고 오셔서 해드릴 게 없네요'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 정으로 가득했던 밤들이, 많이 힘들었었나.


나를 챙겨야 할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질 낮은 음식을 내놓으며 자기 위안을 삼기보다는, 잠시 문을 닫고 재정비하는 식당처럼, 식기와 가구들을 닦아낸다.

 



약을 먹고 다시 자리에 눕는다. 글도, 영화도 보고 싶지 않지만 소중한 시간들이 이렇게 흘러가는 게 안타까워 마른 눈물을 흘린다.


언젠가 또 아픈 날이 오겠지. 그날에도 오늘과 같은 생각을 하며 보낼까, 오늘을 그날의 내가 기억했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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