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수첩에서
요즘 회사에서 여러가지 일로 고민이 많은 그였습니다. 경기가 급속도로 악화되어 그의 회사에서도 실적부진과 같은 문제가 심각한 상황이고 그러다보니 구조조정이다 뭐다 해서 흉흉한 소문이 나돌고 있습니다.
매일 마주치는 사람 모두다 힘들다고 하소연 합니다. 동료들도 마음 편히 웃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힘들기만한데...문득 그는 그녀의 수첩 첫장에 쓰여져 있는 글이 생각났습니다.
결혼하기전..아니....그녀를 만난지 얼마 안되었을때니까...한참 전입니다. 음식점이던가, 카페이던가, 그녀가 화장실에 간 사이...식탁위에 놓고간 그녀의 수첩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우연히도 그 수첩의 첫장이 펼쳐져 있었는데...거기에는 의미심장한 글이 쓰여져 있었습니다. 얼마뒤에...지나가는 말로 슬쩍 그 글의 의미에 대해 그가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음...뭐랄까...그냥 격언같은 거야...누구나 그런 거 하나쯤은 있지 않아? 위대한 위인들의 명언 같은 거...난 이게 맘에 들어서.. 수첩의 맨 앞장에 써놓은거야...이 글은 회사 내 책상위에도 있어...조금 힘들다 싶으면 그냥 한번 읽어봐..그렇다고 아주 중요한 인생의 의미라고 하기는 그렇지만...웬지 고급스럽다는 느낌도 있고..뭐 그래서 써놓았고..수첩을 펼칠때마다..읽어보곤 해.."
웃기는 이야기일지는 모르지만.....얼마전...영어회화 스터디 모임에서..... 그 글을 인용했더니...그 모임을 지도하는 선생님은 물론 다른 이들이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는 조용히 그 글을 떠올려봅니다. 어떤거냐구요?
그 글은...
" Ours is essentially a tragic age, so we refuse to take it tragically. The cataclysm has happened, we are among the ruins, we start to build up new little habitats, to have new little hopes. It is rather hard work: there is now no smooth road into the future: but we go round, or scramble over the obstscles. We've got to live, no matter how many skies have fallen."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된 문장이었습니다. 해석을 하자면...
"우리 시대는 근원적으로 비극의 시대인 만큼 우리는 구태여 이 시대를 비극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대 재앙은 일어났다. 우리는 폐허 가운데 서 있지만 이 폐허속에서나마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하여 조그만한 새 희망에 매달려 출발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상당히 힘든 일이다. 이제 미래로 향한 평탄한 길이란 어디에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장애물을 피해 돌아가든지 아니면 그 장애물과 씨름하면서 헤쳐나가야만 한다. 하늘이 무너져내리다고 해도 우리는 살아나가야만 한다."
언젠가 이 글이 어디에서 인용해온 것인지...그가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대답을 듣고...그는 갑자기 말문이 막혔습니다. 그 표정을 보고 그녀가 웃으며 그에게 말했습니다.
"왜 이상해? 난 너무 진지하게 읽었는데..."
그는...애써..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진지하게? 뭐...그럴수도 있지..뭐..."
네..뭐...좋은 문장이니까...그래도...웬지.. 어디서 나온 글이냐구요? 그녀의 대답입니다.
"현대 영국 작가중에서 가장 탁월한 소설가이자..시인이었던 D.H 로렌스의 챠탈레이 부인 영문본 제 1장 첫부분에 나오는 글이야...괜찮지 않아?"
챠탈레이 부인의 사랑이라....그때 그는 그녀의 얼굴을 몇번이고 다시 쳐다보았습니다. 참 독특한 그녀....지금은 그와 한 집에서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