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번째 이야기
다시 화창한 여름날, 폐역에 모인 히로키, 타쿠야, 사유리. 히로키와 타쿠야는 벨라실러를 조립하는데 온 힘을 쏟고 있었다.
히로키 - 나노 네트는 레이다 반사 안되지?
타쿠야 - 하지만 완충 지역 날 건데? 아무리 외장이 나노 네트라도... 잘못하면 유니온보다 먼저 미군한테 들킬 걸
히로키 - 역시 가능한 낮게 날 수밖에 없겠어. 파도와 지형에 숨어서 말이지. 아침 일찍 나가면 아침 안개에 숨을 수도 있고 말이야. 에조 지도는 있어? 제일 자세한 건 이것뿐이야
타쿠야 - 제일 자세한 건 이것뿐이야. 실제 지형은 가보지 않으면 모르니까. 상륙한 후엔 고도를 잡을 수밖에 없어.
히로키 - 하지만 일단 상륙하면 유니온의 레이다엔 안 잡히지 않을까? 벨라실러의 그림자는 아기 새보다 작을 텐데
타쿠야 - 아마도.. 무척 운이 좋다면 말이지
이렇게 히로키와 타쿠야가 벨라실러의 비행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다.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것 같은 장면이지만 이것도 후반부에서 히로키가 사유리를 싣고 에조로 갈 때, 이 대화에서 나왔던 방법 그대로 하게 되기 때문에 나름 의미가 있다. 히로키와 타쿠야가 기체 조립에 집중을 하고 있을 때, 기체 조립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유리는 책을 읽지만 그것도 지루해진다.
자 이쯤 해서 벨라실러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되었다.
이 벨라실러는 후지사와 히로키와 시라카와 타쿠야가 중학교 2학년때부터 취미로 제작하기 시작한 2인승 경비행기이다.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 기간 동안 완성하여 바다 건너 유니온의 탑까지 비행해 보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사유리의 행방불명 이후 흐지부지 되어버리고 결정적으로 히로키가 도쿄로 전학 가게 되면서 작업실 겸 격납고인 폐역의 버려진 차고에 방치되게 된다. 평범한 경비행체이지만 엔진은 추락한 해상자위대의 무인표적기에서 얻은 제트엔진과 기계공장에서 사들인 프롭엔진이라는 이중체계를 갖추고 있다. 주인공들의 말로는 변형 비행기를 만들어보고 싶었다고 한다. 두 방식의 엔진을 동시에 사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과적으론 중량증가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어버렸다. 한쪽이 고장 났을 때를 대비한 예비시스템이라는 측면에서는 의미가 있을 수도 있다.
게다가 동체에는 '나노네트'라고 언급된 신소재(딱히 실존하는 물질은 아니다)를 사용해, 스텔스 능력까지 갖추었다. 단 2025년 현재, 스텔스기 사용되는 소재가 나노와 그것을 활용한 기술은 맞다.
일단은 벨라실러가 스텔스기가 아니라고 나온다. 그래서 에조의 탑까지 갈 때 완충지대는 레이더를 피하기 위해 초저공 비행으로 가고 육지에 다다르면 제트엔진을 끄고 이목을 피하기 위해 고도를 높여 비행한다고 나온다. 프로펠러가 초전도모터로 움직여서 소음이 적다고 한다. 사실 이 기체의 디자인을 보면 어떻게 저런 비행기가 날아오를 수 있을까 싶지만, 이 작품 자체가 SF물이기 때문에 그것은 감안해야 한다. 본편에 등장하진 않았지만 귀환 시에는 호수에 내려앉는다는 설정이라고 한다.
게다가 극 후반부에서는 주인공 커플이 30km 정도로 추정되는 유니온의 탑 꼭대기까지 올라가 탑을 내려다본다. 냉전기 미국 항공우주기술의 결정체인 U-2, SR-71 등의 고고도 전략정찰기들의 실용한계고도도 30km 안팎밖에 안 된다. 실제로는 불가능하지만 이것도 SF 물 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 거대한 탑을 단 한방에 박살 낸 미사일을 탑재할 수도 있다. 당연히 원래는 생각도 않던 급조였지만 그냥 하룻밤만에 뚝딱뚝딱 해치웠다. 실제로는 이렇게 설계상 상정 외의 페이로드가 발생할 경우 기체의 밸런스가 변화하기 때문에 장기간에 걸친 조정작업과 시험비행이 필수적이다. 물론 작중에선 조그만한 경비행기에 헬파이어 유도탄 사이즈의 미사일을 시험비행도 없이 뚝딱 싣고 그 미사일은 또 문제없이 작동한다.
이 장면도 주목해서 봐야 한다. 사유리의 가방과 바이올린, 그리고 히로키와 타쿠야의 가방이 책상 위에 올려져 있다. 이것이 세 사람이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나중에 바이올린만 남아 있게 된다.
격납고 바로 입구에서 책을 읽고 있는 사유리, 이 작품을 본 대부분은 사유리가 읽고 있는 책이 어떤 것인지 모르고 스쳐 지나가는데, 이 사유리가 읽고 있는 책의 제목은 오시타 사나에 라는 작가가 쓴 夢網(몽망)이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애니에 나오는 것은 하나하나 의미가 있는데 이 책도 그냥 아무렇지 않게 넘기지 않는다. 오시타 사나에는 1995년에 등단한 작가로서 이 책의 내용은 다음과 설명되고 있다.
"꿈과 몸의 경계선에 거품이 일어나는 세포. 출구도 입구도 없는 맨몸의 신경으로 가득 찬 세상에 그 누구도 아닌 우리가 비치고 있다. 섬뜩하고 친숙하고 기묘하게 그리운 작품집".
꿈, 혹은 평행세계를 다루는 이 작품과 연관성이 있다. 그리고 이 작품 배경 시기가 1996년이므로 책이 발간된 시기와 거의 맞다.
자, 사유리는 바깥으로 나와서 폐역으로 향한다. 이 폐역은 사유리가 숱하게 꾸는 꿈에 등장하는 것이라서, 사유리가 알고 있을 것 같지만 본편에서는 전혀 처음인 것처럼 보인다. 이 점에 대해 앞편에서도 지적한 바 있지만 사유리는 계속 꿈이야기를 해왔고 이 폐역이나 벨라실러를 꿈에서 분명히 보았음에도 현실에서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이야기 구성과 전개의 허점 혹은 실수라는 비판이 다수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앞서 설명한 대로 사유리와 탑은 하나였다. 사유리의 할아버지 엑슨 츠키노에가 탑의 설계 도중 정보의 유통망을 사유리의 의식으로 삼은 것 때문이다.(그래서 사유리의 꿈에 기이한 형태의 수많은 탑들이 등장한다) 중 3 시절, 아직은 사유리와 탑이 연결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유리가 꿈에서 깨면 꿈속의 일들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하거나 잊어버리게 된다는 것이 반론의 근거이다.
그런데 히로키와 타쿠야가 "이 비행기로 저 탑까지 갈 거야."라고 한 게 평행우주를 각성시키고 사유리를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폐역의 이동 통로인, 2층으로 올라가서 그 끝에 가서 앉는다. 위험천만하게 시리... 왜 여주인공들은 꼭 이런 위험한 곳에 가서 앉는 걸까?
그때 바람이 불면서 꿈인지, 환상인지 알 수 없는 광경이 펼쳐진다. 화면의 색조가 회색으로 바뀌면서 저 멀리 에조 중앙부에 있는 탑을 향해 전투기들이 돌진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무엇인가, 격렬한 공중전이 벌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다 한 순간에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고 강한 후폭풍이 밀려 닥치면서 사유리가 있던 자리가 무너져 내린다.
사유리는 간신히 난간을 붙잡고 버티는데 환상은 다시 현실로 바뀐다.
작업을 하고 있던 히로키는 뭔가 이상한 상황이 일어난 것임을 깨닫고 공장을 나와 보다가 사유리가 폐역의 난간에 한 손으로 버티고 있는 것으로 보고 즉시 달려간다.
겨우 버티고 있다가 난간이 무게를 못 견디고 무너져 내리는 순간 히로키가 그녀의 팔을 붙잡는다.
여기서 사유리가 결정적인 말을 한다.
사유리- 우리 전에도...
이때 사유리는 오랫동안 반복되어 온 꿈속의 상황을 어렴풋이 기억해 낸다. 수많은 탑들 사이에 외롭게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을 때 날아오던 비행체는 벨라실러였고, 그녀를 구하러 오는 이가 히로키였음을...
뒤 이어 타쿠야까지 달려오고, 세 사람은 그대로 물속에 빠져버린다.
사유리 - 나 말이야, 아까 한 순간 꿈을 꿨어
히로키 - 꿈? 무슨 꿈인데?
사유리- (멈칫거리면서) 잊어버렸네. 그렇지만 아마 저 탑에 관한 꿈일 거야
타쿠야- 거짓말 같은 광경이니까. 유니온은 정말 대단해
히로키 - 탑의 끝, 다른 세상까지 이어진 것 같아
사유리 - 저녁 해. 좀처럼 안 지내
이때 다시 히로키의 내레이션이 흘러나온다.
"정말로 그 해 여름은 특별했다. 하지만 날 둘러싼 세상은 이후 몇 번이고 날 배신한다."
히로키 -그로부터 3년, 그날을 마지막으로 난 사와타리를 만나지 못했다.
이 내레이션과 함께 화면에 비친 책상 위에는 사유리의 바이올린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 해 여름에 사유리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만다. 히로키와 타쿠야가 사유리의 집으로 찾아갔지만 사유리가 어떻게 어디로 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바이올린만 남아 있는 저 장면은 세 사람이 서로 흩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히로키가 말한 대로 이 여름이 특별했던 것은 사춘기 중3, 그 여름날이 사유리와 히로키, 그리고 타쿠야가 함께 하며 행복했던 마지막 여름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