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모이의 청어가도
*홋카이도 유산北海道遺産이란
홋카이도 유산은 홋카이도 와 관련된 자연·문화·산업 등 중에서 차세대에 계승하고 싶은 것으로 홋카이도 유산 구상 추진 협의회가 선정한 유형무형 재산 군이며, 2022년 제4회 선정 시점에서 74건이 선정되고 있다.
이번 이야기는 홋카이도 유산 시리즈로 첫 번째는 홋카이도 루모이의 청어 가도이다. 유산시리즈의 1번은 왓카나이에 있는 북방파제인데, 이곳에 대해서는 철도 여행시리즈의 왓카나이 편에서 다뤘다. 그래서 2번으로 선정되어 있는 루모이의 청어 가도留萌の ニシン街道가 이번 이야기의 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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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루모이가 어떤 곳인지부터 살펴보자. 루모이 시(留萌市)는 홋카이도 북서부에 위치하는 시이며, 루모이 지청의 소재지이다. 시명의 유래는 아이누어의 ‘루루몹페’(ルルモッペ, 조수가 깊숙하게 들어가는 강)로부터 유래되었다. 주된 산업은 무역 외에도 상업, 토목업, 수산가공업이며, 이 도시는 공무원의 비율이 가장 높다.
에도 시대까지는 아이누와 일본인이 함께 살고 있었고, 메이지 시대에는 청어잡이의 북상과 함께 어촌으로서 일본인의 마을이 시내에 흩어져 있었다. 다이쇼 시대에는 각지에 탄광이 발견되어 융성했다. 1947년경에는 루모이 본선, 하보로 선, 데시오 탄광철도, 루모이 철도, 닷푸 삼림철도 등 많은 철도 노선이 루모이 역까지 노선을 연장하고 있었다. 1960년대까지의 인구는 4만명 이상이었지만, 청어잡이의 쇠퇴와 탄광의 잇따르는 폐산으로 감소하기 시작해서, 지금은 17,742명(2025년 9월 30일 기준) 수준이다.
지금은 쇠퇴해 가는 항구도시이지만 1900년대, 그러니까 청어 잡이가 쇠퇴하기 시작한 1950년대 이전까지는 정착인구 4만 명에, 이주 노동자 3만 명 정도가 루모이에 살고 있었다. 다른 기록을 보면 홋카이도 서쪽 연안 해안선 (오타루에서 왓카나이까지 전체 길이 380km, 이 해안선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오로론 라인이라고 부른다 )의 청어 잡이는 메이지 시대 말기부터 다이쇼 시대에 전성기를 이뤘고 이 시기의 초봄 산란기에 회유하는 청어의 어획량은 연간 100만 톤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홋카이도에서 청어잡이로 부를 이룬 이들이 많아져 곳곳에 청어 저택이 늘어났다. 바로 그 청어잡이의 전성시대의 흔적들이 루모이에 남아 있고, 이것이 홋카이도 유산이 된 것이다.
일본의 청어 잡이에 대해 월간 중앙 2020년 3월호에 최치현의 우리가 몰랐던 일본, 일본인(27)] 연안 해운 황금기 이끈 범선 기타 마에부네(北前船)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겨울이 긴 홋카이도의 봄은 개화(開花)보다 해안선을 따라 먼저 온다. 청어가 알을 낳기 위해 떼로 몰려드는 것을 기쿠(群来)라고 한다. 산란(産卵)과 방정(放精)으로 바다 색깔이 우윳빛이 된다. 바다 색이 변하는 장관을 보기 위한 관광상품까지 있다. 갈매기가 울어대며 청어 떼가 몰려들면 청어잡이 어부들도 겨우내 정치망(定置網)을 가다듬고 출어를 준비한다. 설렘의 봄은 바다의 노래로 시작한다.
‘이시카리반카(石狩挽歌)’라는 노래 작사가인 나카니시 레이(なかにし礼)는 청어잡이 풍경을 잘 묘사했다.
“갈매기가 우니까 청어가 올 거라고/ 붉은 소매의 어부들이 떠들어 댄다/ 눈 속에 파묻힌 파수막 구석에서/ 나는 밤새도록 밥을 짓는다.”
청어는 한류성 어종으로 연안에 무리를 이뤄 서식하다가 산란기가 되면 떼 지어 이동한다. 어부들은 파수막에서 청어의 움직임을 살펴보고 청어가 오기만을 기다린다. 부지런하게 움직이는 청어잡이 일꾼의 모습이 선명하다. 청어가 자주 나타나면 부자가 되겠지만, 청어는 신어(神魚)라 불릴 정도로 출몰에 변덕이 심했다. 청어의 움직임에 따라 부의 향배도 결정됐다. 네덜란드가 15세기 초반 해양 강국으로 발돋움한 계기도 청어잡이 어업 중심지가 발트해에서 북해로 이동하면서부터였다.
에도 시대부터 쇼와 초기까지 몰려드는 청어를 잡느라 니혼카이 연안은 붐볐다. 청어잡이 산업은 당시 홋카이도의 중추적인 산업 중 하나였다. 매년 봄 어기(漁期)가 가까워지면 도호쿠 지방과 홋카이도 각지에서 안슈(ヤン衆)라 불리는 어부들이 일확천금을 꿈꾸며 홋카이도의 서해안 어장으로 속속 모여든다. 그들은 숙소를 겸한 선주 저택인 ‘청어 저택’에 집결해 어선 선장의 통제하에 청어 ‘무리’를 기다린다, 이윽고 청어 무리가 도착했다는 기별이 당도하면 일제히 배를 저어나가 그물을 펼치고 청어를 잡아 올린다.
수확한 청어의 일부는 바닷가에서 ‘말린 청어’로 가공한다. 나머지는 가마솥에 끓여 기름을 짜낸 뒤 찌꺼기를 생선 지게미로 가공한다. 지게미는 배편으로 서일본에 이송돼 현지에서 귤·쪽·면화 재배의 고급 비료로 사용됐다. 어기가 일단락되는 5월, 홋카이도 서해안에서는 청어 제품 판매가 호황이다. 귀향 전 환락가는 어부들로 북적거린다. “에사 시(市)의 5월은 에도에도 없다”라고 할 정도로 항구는 활기가 넘쳤다."
앞서 설명한 대로 홋카이도 청어 잡이의 전성기 시절에는 오타루부터 왓카나이까지 홋카이도 서북쪽 해안을 따라 항구들이 북적거렸고 그 항구들 중의 하나가 루모이이다. 현재 남아 있는 루모이의 청어 관련 시설은 규루모이사카케교바旧佐賀家漁場, 구 하나다케 반야 (旧花田家番屋)등이 남아 있다.
그 옛날 루모이 지역 연안에 밀려온 청어들은 연안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였고, 많은 청어번야(番屋:고기잡이 작업장 겸 숙박시설)가 지어지며「센고쿠바쇼(千石場所)」로 널리 알려졌다. 당시 사람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사가케반야(佐賀家番屋)」는 홋카이도에서도 유일하게 건물과 선착장이 그대로 남아 있는 반야로서 1997년에 일본 국가지정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사가케 교바는 1844년에 건축되어 1957년까지 113년 동안 청어 잡이에 사용된 건물이다.
이곳에는 당시 어로 장비도 다수 보존되어 있는데 그중 3,745 점이 중요 유형 민속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구 하나다케(花田家) 반야」(일본 국가지정 중요문화재)는 1905년 건축된 곳으로 전성기에는 18개의 통(統:고기잡이 집단의 단위)이 운영되었고, 어부의 수는 500명을 훨씬 뛰어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반야는1905년경에 건축되었으며 홋카이도에서 현존하는 반야 중 최대규모의 건축물이다. 이곳은 청어잡이 반야(番屋: 고기잡이 작업장 겸 숙박시설)와 아미모토(網元: 어부를 고용하여 고기를 잡는 사람)의 주거지이다.
*코멘트 - 홋카이도의 청어잡이는 전성기 시절에 홋카이도 각지에 여러 흔적을 남겼다. 오타루에도 청어와 관련된 저택이 있고 오타루의 유리 공예의 근원에는 청어잡이 때 사용했던 어등이 있다. 이것 하나만 보고 루모이를 갈 필요는 없고, 오로론 라인을 따라가는 여행에서 잠시 들러볼 만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