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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R소야본선 여행기(7) - 왓카나이항 북 방파제

사할린으로 떠나는 항구, 왓카나이 항

by 늘 담담하게

왓카나이역에서 항구 쪽으로 걸어가면 왼쪽에 거대한 석조 건물이 보인다. 바로 북방파제돔北防波堤ドー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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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홋카이도 유산으로 선정된 북방파제 돔은 높이 14m, 길이 427m 고대 그리스 신전의 모양을 한 기둥이 6m 간격으로 70개가 늘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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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북방파제 돔은 1931년부터 5년간에 걸쳐 완공되었다. 원래 이 방파제돔이 있기 전에 약 5.5m 높이의 방파제가 있었으나, 연중 강한 바람이 부는 왓카나이항에 거대한 파도가 몰아쳐서, 방파제를 지나는 사람들이 파도에 휩쓸려 바다로 추락하는 사고가 연이어 발생하자 새로운 건축물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 거대한 구조물은 방파제의 역할뿐만 아니라 당시 왓카나이항 부두에서 역까지의 환승 통로로 사용되었다. 이 방파제 돔이 만들어진 후 왓카나이역에서 이곳까지 철로를 연장하고 임시역을 만들었다. 승객들은 이 돔을 통해 사할린으로 가는 연락선을 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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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이전에 촬영된 사진이다. 당시에는 이 방파제안에 여객선을 타기 위한 대합실이 설치되어 있었다. 사진상에 보이는 배가 있는 위치는 현재는 매립되어 있다. 왓카나이 부두역이 만들어진 것은 1938년이었다.


이 놀라운 건축물을 만든 사람은 당시 스물여섯 살의 츠치야 미노루土谷実이다. 아직 콘크리트가 일반화되기 어려웠던 시절에 이런 거대한 구조물을 건축했다는 것은 쉽사리 믿어지지 않은 것이었다.


d_1.jpg (츠치야 미노루 1904-1977)

왓카나이에 현대적인 항만의 건설이 시작된 것은 1920년이었다. 그때까지 작은 어촌에 불과했던 왓카나이에 철도가 개통되고 나서 점차 중요한 항구로 발전하게 되었는데 북해도의 다른 항구들이 주로 어항 혹은 석탄의 선적항으로 개발 이용된 반면에 왓카나이는 사할린으로 가는 관문항으로 건설되었다.


그 시기인 1928년 홋카이도 제국 대학 토목 공학과의 제1기생으로 졸업을 한 츠치야 미노루는 당시 홋카이도 항만 건설을 지도 감독하고 있었던 이토 쵸에몬의 권유로 왓카나이 축항사무소에 부임을 한다.


그가 북방파제의 돔 디자인을 설계한 것은 그로부터 3년 후인 1931년.. 스물여섯의 패기만만한 이 젊은 기사에게 설계를 지시한 것은 사무소 소장인 히라오 토시오였다. 츠치야가 설계를 담당한 것은 그가 대학 시절에 연구 개발 단계였던 아치 콘크리트 교량의 디자인을 배웠다는 이유에서였다. 츠치야는 2개월 만에 강도 계산에서부터 도면까지 모든 설계를 마쳤다.


돔 지붕으로 만든다는 것은 히라오가 한 것이지만 그것을 구체적인 형태로 만들어낸 것은 츠치야였다. 츠치야가 모티브로 잡은 것은 당시 홋카이도 대학의 건축과에서 강의하고 있던 은사의 수업 노트에 있던 유럽건축의 프린트였다. 거기에 그리스 로마시대의 신전과 극장, 교회등이 그려져 있었고 이것을 참고한 것이다.


처음 설계 당시에는 기둥과 기둥 사이는 수평으로 계획되었지만 아치로 변경되었다. 지붕이 곡선으로 되어 있어 구조물 전체의 균형을 생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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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콘크리트로 타설 하는 모습이다. 이 방파제의 기초공사에는 당시에는 드문 콘크리트 말뚝이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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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한 가지... 역시 드물게 이 공사에는 증기 해머가 사용되었다. 쉽게 말해 땅속으로 콘크리트 말뚝을 박아 넣는데 증기로 된 해머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나무 망루에 증기해머를 장착하고 모두 700개의 콘크리트 말뚝을 땅속에 박아 넣은 이런 대규모의 토목공사는 당시 왓카나이가 처음이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돔은 태평양전쟁이 끝난 후, 사할린으로 가는 항로가 폐지되고, 석탄자재 창고로 사용되었다. 그러다 보니 1965년대에 들어서면서 노후화가 진행되어 1970년에 부분적으로 보수공사를 했다. 하지만 1975년에는 콘크리트의 표면이 떨어져 나가는 현상이 발생하는 등 건축물 곳곳에 위험이 드러나게 된다.


그래서 1978년에 건축 초기 모습을 재현한 새로운 돔 건설을 시작했고 3년 후에 완성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다.

이 공사로 인해 돔의 길이는 3m가 더 늘어나 427m가 되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지금의 북방파제 돔은 1930년대에 지어졌던 것이 아니라 원형의 설계도로 재건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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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설계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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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왓카나이항역에 있던 개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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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도로로 바뀐 옛 왓카나이항역의 궤도 흔적, 왼쪽이 북방파제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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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왓카나이항역에 있던 대합실


태평양 전쟁이전에 이 항구역을 통해 치하쿠 연락선稚泊連絡船을 타고 사할린으로 갔다. 치하쿠 연락선은 홋카이도 왓카나이와 가라후토(사할린) 오토마리를 오갔던 철도 연락선으로 이름은 왓카나이(稚内)의 '稚'와 오도마리(大泊)의 '泊'를 따서 지었다.


러일전쟁 승리의 대가로 일본은 1905년 사할린 섬 남부 절반을 차지했다. 이 섬은 러시아 제국에게 있어서는 땅끝 변방의 섬에 불과했지만 일본에 있어서는 일본 열도의 연장으로 볼 수 있는 중요한 위치였기 때문에 당시 일본 정부는 개척을 위해 대대적으로 일본인을 이주시키고 곧바로 철도 건설에 착수해 1906년에 개통했다. 당시 도쿄의 도쿄역에서 시작하는 도호쿠본선 - 세이칸 연락선- 하코다테본선 - 소야본선을 타고 왓카나이역에 내려 다시 치하쿠 연락선을 통해 가라후토토선으로 도요하라역까지 이어지는 개념이었기 때문에 치하쿠 연락선은 배에서 내린 사람들이 대기 중인 열차에 탑승하는 등 급행열차 시간표와 그대로 연계되어 운행했다. 그래서 운영도 일본국유철도의 전신인 철도성에서 직접 운영했다.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하고 사할린을 소련군이 장악하면서 1945년 8월 23일 밤 운항을 마지막으로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당시 왓카나이역에 내린 사람들이 항구로 가서 연락선을 안전하게 타기 위해 북방파제가 1936년에 완공되자 일본 철도성은 바로 방파제에 왓카나이잔교역稚内桟橋駅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38년 12월에 완성된다. 당시 왓카나이에 도착한 사람들은 거대한 북방파제를 보고 놀랐다고 한다.


북방파제돔은 왓카나이 여행에서 빼놓지 않고 봐야 하는 곳이어서 왓카나이를 여행하는 이들은 대부분 돌아보게 된다. 바람이 많이 부는 왓카나이 항을 감싸고 있는 방파제돔을 돌아보면서 그 옛날 이곳을 통해 사할린으로 떠났을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 사람들 속에는 일제 강점하의 조선인들도 섞여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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