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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의 사랑이야기

당신과 함께 하는 삶

by 늘 담담하게

늘어지게 늦잠을 잘 수 있는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새벽에 깨어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침대에서 빠져나왔습니다. 그녀는 깊은 잠이 들어 있어서 그가 깨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어제 그는 대학병원 장례식장에 조문을 다녀왔습니다. 오랫동안 그를 아껴주셨던 분의 부고가 전해져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의 은사였던 그분은 그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아버지와 함께 찾아뵐 때마다 그를 귀여워해주셨기에 가끔씩 그는 혼자서 그분의 집으로 놀러 가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선생님과 선생님의 부인은 그에게 맛있는 것들을 내어주시기도 하고 그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들려주었습니다.

그가 그분의 집에 갈 때마다 오래 시간을 보냈던 곳은 바로 선생님의 서재였습니다. 그의 집에서는 볼 수 없었던 온갖 종류의 책들이 책장 가득히 꽂혀 있었고 그는 갈 때마다 한 권씩 책을 꺼내어 읽곤 했습니다.



이제는 사진 속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선생님. 얼마 전에 만나 뵈었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

"아니 선생님.. 이렇게 정정하신데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

"아니... 이젠 느껴져... 내 삶의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시간이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것 같아..."


부인이 돌아가신 지가 벌써 5년 전.... 그동안 혼자서 지내오셨는데....


"네가 결혼을 한지가 얼마나 되었지?"

"아직 일 년이 안 지났어요..'

"그렇구나.... 이제 갓 걸음마를 뗀 셈이구나...."

"사모님이 그리우세요?"

"그립지... 보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이지..."

"요즘도 사모님에게 가끔 가세요..?"

"아니 요즘에는 안 가... 이제 멀지 않아 보게 될 텐데.... 그 사람 묘는 뭐 하러 가..."


선생님은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제 내게 주어진 시간이 없어서.... 너에게 말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단다..."

"네 말씀하세요.."

"네가 결혼을 하기 전에 내게 물었지? 어떻게 해야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할 수 있겠느냐고..."

"네 그랬지요..."

"음... 그때에는 내가 특별한 말을 못 해주었어... 딱히 내가 너에게 그런 말을 해줄 자격이 있을까 싶기도 했고... 너와 나는 각기 다른 시대에 살았기 때문에... 내가 살았던 시대의 방식은 네가 이해하지 못하는 게 많아.... 우린 쇼와시대에 태어났던 사람들이야.. 나라가 없던 시대였지... 집사람을 만난 것은 전쟁 이후였고.... 연애가 드물고 그냥 선봐서 결혼하던 그 시절에 우리는 연애를 했었고.. 결혼을 했었어... 그렇게 아이도 낳고... 그래도 좋았단다... 아니 행복했었어.


사랑이라는 게 뭘까.... 그 식민지... 태평양전쟁.... 해방.... 한국전쟁.... 우리가 살던 시절은 온통 혼란이 계속되었지만... 집사람과 내가 함께 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 어려운 시대를 지나며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지금 돌이켜보면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었어.. 사랑한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어도... 난 그게 사랑이라고 믿고 있어... 그때에 난 지금의 너처럼 아내와 영원히 함께 할 것이라고 생각했지.. 죽는 날까지 함께 할 것이라고...


그런데... 우리가 같은 세상에 태어나서... 만나고 좋아서 결혼도 하고 그렇게 살아온 것은 행운이지만... 가야 할 길은 결국 다른 것이었어.. 아내가 먼저 내 곁을 떠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결국 우리의 끝은 다른 거지... 물론 그게 잘못된 것은 아니야... 원래 그렇게 되어 있는데... 내가 그걸 몰랐던 거지... 어리석은 늙은이의 잔소리라고 생각하지 말고.... 네 아내를 항상 사랑해 주렴.... 좀 더 멋지게 말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은 각자의 마음속에 영원히 담아갈 수 있는 거지만... 삶은 영원하지 않아..."


그날, 오후 내내 선생님과 나누었던 대화.. 갑자기 그 말들이... 알 수 없는 마음의 무게가 되어 그를 짓누르는 것 같았습니다. 새벽의 희미한 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문득 그녀의 얼굴을 돌아보았습니다. 여전히 잠버릇이 심해서... 그의 자리까지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날마다 주름이 늘어간다고 불평을 하는 아내... 그렇지만 여전히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녀..


하지만 그녀도.. 많은 시간이 지나가게 되면... 점점 더 늙어 가게 될 테고... 어느 순간 할머니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 그녀와 영원한 작별을 해야 할 날이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물론 그때에도... 그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그녀를 사랑했던 마음과 그녀와 함께 했던 모든 순간의 추억들이 함께 할 테지만.. 삶의 끝은 다를 것입니다...


그는 일어나서.. 그녀에게 다가가서... 편하게 눕혀주었고 이불을 끌어당겨서 그녀의 몸에 덮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손을 뻗쳐... 그녀의 머릿결을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잠든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등뒤로.... 서서히 아침의 빛들이 비춰오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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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연재